칠산바다에서 뭐가 나오냐고요?
칠산바다에서 뭐가 나오냐고요?
  • 김준 박사
  • 승인 2021.09.12 11: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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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광군 봉남리 설도
영광과 무안을 잇는 칠산대교
영광과 무안을 잇는 칠산대교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말이 있다. ‘부자 3대 못간다’는 말도 같은 의미다. 이는 재산을 지키려면 자식교육을 혹독하게 시켜야 한다는 말로 귀결된다. 전남 영광군 칠산바다에서 조기잡이하는 것이 뱃사람들의 로망이었다. 그곳에 가면 만선을 해 가난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돈실러가세, 돈실러가세, 칠산바다로 돈실러가세’라는 어업노동요도 불렀다. 칠산바다는 황금어장이었다. 황금갑옷 입은 장수처럼 산란기를 앞둔 노란 조기들이 모여들었다. 지금은 어떤가. 조기잡이 안강망 배들은 더이상 칠산바다를 찾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금 칠산바다가 텅 빈 것은 아니다. 많은 뱃사람들은 여전히 칠산바다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다. 가을로 가는 길목, 가게마다 그릇에 담긴 보리새우와 대하가 손님을 기다린다. 덕자와 병어도 가는 철을 아쉬워하고, 바구니가 작을 정도로 큰 서대도 누워 있다. 두우리 모래갯벌에서 캐 온 백합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누운섬, 눈섬, 설도

설도마을은 1927년 전주최씨가 무안 임자에서 들어와 간척지 농사를 지으며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무인도였던 설도는 마치 사람이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누운섬’ 와도라고도 불렸다. 일제강점기 누운섬이 ‘눈섬’으로 짧게 발음되다 한자 ‘설도’로 잘못 표기돼 오늘에 이렀다. 1930년대 설도를 사이에 두고 옥실리와 야월리 방향으로 각각 방조제를 쌓아 봉남평야가 형성되면서 설도는 섬에서 육지로 바뀌었다. 갯벌을 막아 일군 평지에 봉긋하게 솟아 오른 설도는 100여 가구로 이뤄진 마을이다. 100여 가구 중 25가구는 어선어업을 하는데, 이들은 안강망이나 닻자망으로 직접 잡은 수산물을 바닷가에 새로 올린 건물에서 판매한다. 이렇게 어민이 수협을 거치지 않고 직접 판매하는 곳은 흔치 않다. 그 건물 뒤, 역시 새로 지은 건물엔 젓갈 가게가 있다. 설도에 젓갈판매 가게는 10여 호에 이른다.

설도 젓갈타운은 강경이나 광천 젓갈타운에 비하면 규모가 작다. 하지만 새우를 직접 잡아 염장해서 판매한다. 설도의 젓갈과 활어와 선어는 100% 칠산바다에서 잡아왔다. 육젓, 오젓, 추젓, 붉은 새우젓, 중하젓, 대하젓, 멸치젓, 멸치액젓, 까나리액젓, 송어젓, 황새기젓, 갈치창젓 등 한 젓갈가게에서 헤아려보니 약 29종의 젓갈이 있었다. 대부분 어민들이 직접 잡은 것이다. 처음에는 영광과 광주지역에서 온 손님이 많았지만 차츰 대전과 서울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왔다. 추석명절이면 고향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많은 출향인들이 설도에 들려 고향젓갈을 사가기도 한다. 최근엔 주말이면 젓갈도 사고 싱싱한 갯것들도 맛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인해 설도는 북새통이다.

50여 년째 칠산바다에서 조업을 하는 김씨는 새 건물을 올리기 전, 선창에 큰 대야를 놓고 잡아 온 수산물을 직접 팔았다. 판매는 아내가 맡았다. 나중에 임시천막을 치고 배 이름을 상호 대신 걸고 단골을 맞았다. 설도에서 배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먹고살았다. 싱싱하고 수산물에 넉넉한 인심까지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영광군 염산면 설도마을
영광군 염산면 설도마을

덤이 있는 젓갈시장

김 씨가 좌판에 올려놓은 생새우가 순식간에 동이 났다. 오전 물때에 건져온 오젓과 육젓은 말할 것도 없고 황석어와 잡젓까지 바닥이다. 대전과 군산에 왔다는 한 무리 손님들은 아직 선별도 하지 않는 새우까지 들춰내더니 가져갔다. 겨울 김장을 준비한다고 했다. 대전에는 가까운 곳에 강경젓갈시장이 있고, 군산에서는 곰소젓갈시장도 있는데 설도항까지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 완판을 한 새우는 닻자망으로 잡은 생새우다. 긴 자망그물 여러 폭을 연결해 큰 닻으로 고정시키고 물길을 따라 오가는 새우를 잡는다. 이런 방식으로 새우를 잡는 곳은 칠산바다와 강화해역 일대다. 닻자망 외에도 안강망을 이용해 젓새우를 잡기도 한다. 안강망은 자루그물을 갯골에 설치하고 조류를 따라 들어오는 새우를 비롯해 병어, 황석어, 꽃게 등 갯골로 올라온 서해 모든 바닷물고기를 잡는다. 안강망은 두세 명이 조업을 하지만 닻자망은 대여섯 명의 선원이 필요하다. 그만큼 비용과 노력이 든다. 닻자망은 과거인 새우 외에 조기를 잡을 때도 사용했다. 설도항은 닻자망보다는 안강망배가 많다. 직접 새우를 잡아 포구에서 판매하며 유명해졌다. 새우젓 중 가장 비싼 오젓과 육젓은 크기가 다르다. 오월에 잡으면 오젓, 유월에 잡으면 육젓으로 구분한다. 하지만 유월에 잡아도 크기가 작고 튼실하지 않는 새우는 오젓으로, 튼실하고 큰 새우는 육젓으로 나눈다. 그래서 육젓을 ‘육(肉)’ 젓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유월 하순에 잡은 새우지만 작은 것은 오젓으로 팔기도 한다. 가만히 지켜보니 생새우 13㎏을 저울에 올리고 11㎏ 비용만 받았다. 또 15㎏을 구입하면 13㎏ 비용만 받는다. ‘젓국 좀 넣어 주세요’라며 손님이 돈을 건네며 말한다. 예로부터 새우젓 장수에게는 ‘덤통’이라는 문화가 있었다. 그 덤통에는 젓국이 있었다. 단골에서 주는 젓국물을 담은 통이다. 본통은 진짜 좋은 새우젓을, 덤통에는 품질이 떨어지는 젓국물을 담았다. 해마다 단골들이 새우젓을 사기 위해 설도를 찾는 이유다.

새우를 사면 직접 천일염으로 버무려 준다.
새우를 사면 직접 천일염으로 버무려 준다.

 

기독교 순교사적지 1호, 염산교회

한국전쟁 전까지 염산면의 교회는 1908년 4월 5일 설립된 야월교회와 1947년 4월 28일 설립된 염산교회 두 곳뿐이었다. 야월교회는 미국 남장로교선교사 배유지(E. Bell)가 방문하면서다. 영광군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교회는 백수면 대전리교회(1903)다. 이후 묘량면 신천리 교회(1904), 영광읍 무령리교회(1905) 그리고 야월리교회가 설립됐다. 법성포로 향하던 배유지 선교사가 탄 배가 야월리에 정박한 것이 계기였다. 이미 기독교인들이 있었던 야월리에서 세례를 주고 성례 활동을 했던것이다. 염산교회는 나룻배를 타고 야월리교회로 다니던 옥실리 교인들이 마을에 세웠던 옥실리교회를 폐쇄하고 해방 후, 면 소재지가 된 염산교회를 설립했다. 염산에 기독교가 자리를 잡은 것은 소금과 무관치 않다. 바닷물을 끓여 만든 소금(煮鹽)을 뱃길로 목포로 운반해 판매했다. 소금배가 자주 드나들며 개항한 목포를 통해 기독교 등 서양문물과 접할 기회도 많았다.

한국기독교가 지정한 1호 순교지가 있는 염산교회
한국기독교가 지정한 1호 순교지가 있는 염산교회

영광지역 구수산과 불갑산 그리고 염산으로 넘어오는 돌팍재는 한국전쟁기에 좌익 유격대와 군경의 전투가 잦은 지역이다. 특히 염산면은 서울수복일인 1950년 9월 28일보다 늦은 1951년 1월 21일에 수복됐다. 그 사이에 좌익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염산만 아니라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백수와 불갑 지역 일대도 여전히 좌익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 사이 지방 유격대에 의해 염산교회 교인 2/3에 해당하는 77명, 야월리교회 교인 65명이 수장, 참살, 생매장 등 잔혹한 방법으로 학살되었다. 염산교회만 아니라 야월, 백수, 법성포, 묘량 등에서 194명이 순교했다. 2003년 교인을 돌멩이에 매달아 수장시킨 수문통 자리에 ‘기독교인 순교탑’이 세워졌다. 그리고 2014년 칠산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합장무덤과 기념비와 기념관이 세워졌다. 당시 교회가 있던 자리에 예배당도 세웠다. 염산교회는 77명 중 32명을 교회 앞 칠산바다가 보이는 곳에 합장했다. 살아남은 40여 명의 염산교회 신자들은 인민군이 물러간 이듬해 1951년 2월 항아리 속에 숨겨둔 성경책을 꺼내 예배를 올리며 제단을 신축했다고 한다. 2014년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순교자 명부에 염산교회 순교자 77명을 등재하고, 2015년 6월 제1 순교사적지로 지정했다.

한국전쟁기에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을 모신 추모공원(염산교회 내)
한국전쟁기에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을 모신 추모공원(염산교회 내)

상생방안은 없을까

설도 젓갈이나 수산물이 매력적인 것은 어민회와 젓갈협회와 마을공동체가 중심이 되어 수입산을 규제하고 불법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설도포구 활성화를 위해서 축제를 만들고, ‘안강’ 갈대숲을 수변공원으로 바꾸고 쉼터도 마련했다. 아름다운 포구로 거듭나기 위해 관광객을 만족시킬만한 서비스와 쾌적한 주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많은 예산을 투입해 건물을 짓고 수변공원도 조성했다. 최근 향화도에서 무안반도와 이어지는 칠산대교가 개통돼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설도가 한단계 도약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진 거다. 하지만 운영문제로 한 차례 홍역을 치뤘던 설도젓갈타운 홍보관과 전망대는 여전히 비어 있고, 심지어 비가 새는 곳도 있다. 센터 안에 마련한 특산물판매장나 식당도 역할을 못하고 있다. 대신에 바닷가에 마련된 쉼터엔 회와 탕을 즐기는 사람들로 빈자리가 없다. 모두 선주들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구입한 수산물들이다. 부자 3대 가기 어렵다는 말을 행정이나 설도 어민이나 입주 상인이나 새겨야 한다.

칠산바다는 다행스럽게 건강하다. 조기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칠산바다는 철철이 주꾸미, 병어, 서대, 노랑가오리, 젓새우(오젓, 육젓, 추젓), 황석어, 중하, 대하, 풀치, 민어, 병어, 낙지, 보리새우, 숭어를 내준다. 모래갯벌과 펄갯벌이 있어 백합, 꽃게, 민꽃게, 피뿔고둥, 망둑어도 자리를 차지했다. 앞으로는 어찌 변화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위협요인은 크게 증가하고 있다. 육지와 염전과 갯벌과 칠산바다로 이어지던 해안경광이 최근 육지와 태양광과 갯벌과 칠산바다로 바뀌었다. 염전은 넓은 의미로 어업으로 분류했다. 갯벌처럼 육지와 바다 사이에서 오염원을 차단하고 갯벌훼손과 개발을 막는 완충작용도 했다. 그 역할을 하는 공간이 사라졌다. 갯벌 너머 먼 바다에는 풍력발전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그나마 역할을 하고 있는 칠산바다를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기가 떠난 지 60여 년이 지났다. 인간사로 보면 두 세대가 지난 셈이다. 설도항에서 구경할 수 있는 다양한 수산물이 30년 후에도 지속되려면 무엇을 엄격하게 해야 할까. 분명 지금 가고 있는 정책방향은 아닌 것 같다.

바닷가에서 회와 탕을 즐기는 손님들
바닷가에서 회와 탕을 즐기는 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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