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㊷ 거친 섬에 바지락이 머물다
김준의 어촌정담 ㊷ 거친 섬에 바지락이 머물다
  • 김준 박사
  • 승인 2021.08.12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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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군 안면읍 황도리
채취한 바지락을 운반하는 모습
채취한 바지락을 운반하는 모습

서해안 어촌마을의 경제기반은 갯벌이다. 이 갯벌에서 이뤄지는 양식어업에서 바지락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규모의 크고 작음 차이는 있지만 서해 어촌마을 중 바지락밭 한 뙈기 없는 마을은 없다. 먼바다의 외딴 섬마을에도 포구 안쪽 작은 텃밭처럼 바지락밭이 있다. 그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바지락밭을 가꾸는 마을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황도리를 소개한다.

황도는 행정구역상 섬 전체가 황도리 한 마을이지만 이곳에서는 큰마을, 은거지, 집너머, 살마꿈, 진살미 등 다섯 개의 작은 마을로 나누어 불린다. 많은 원주민들이 섬을 떠났지만, 그 자리는 또 외지인들이 들어와 메꾸고 있다. 현재 황도에 있는 펜션 20여 개 중 원주민이 운영하는 것은 채 반도 되지 않는다. 천수만 복판에 자리잡은 황도는 50여 년 전까지만해도 주민 대부분이 고기잡이 어선어업에 종사하던 순수 어촌이었다. 특히 1960년대 중반에는 안강망 어업으로 흥청댔던 곳이다. 1970년, 천수만이 막히면서 황도 갯벌에는 큰 변화가 일었다. 서산 A지구와 B지구의 간척 사업으로 조류가 바뀐 것이다. 황도 주변 해초들은 갯벌 흙에 묻혔고 산란하기 위해 황도를 찾던 물고기들도 자취를 감췄다. 자연히 낚시꾼들도 발길을 끊었다. 1982년 쌓은 안면도와 황도를 잇는 제방으로 인해 조류 소통이 막혔고, 번성했던 김 양식도 어려워졌다. 구 다리를 헐고 바닷물이 잘 통하는 연도교로 바꾼 것은 2011년이 되어서다.

 

바지락어장으로 이동하는 마을주민들
바지락어장으로 이동하는 마을주민들

섬을 지키는 바지락밭

2009년 7월이었다. 물이 빠지는 시간인 새벽 4시, 요란한 경운기 소리에 후다닥 채비를 하고 갯벌로 나갔다. 손수레를 실은 30여 대의 경운기와 트랙터가 갯벌을 가로지르며 바지락밭으로 향했다. 트럭도 뒤를 따랐다. 마을주민의 대이동이다. 그렇게 도착한 바지락어장엔 아직 물이 덜 빠져 무릎까지 물이 올라왔다. 어촌계장이 “작은 조개를 캐지 마시고, 씨알이 굵고 좋은 것만 캐 주십시오. 그리고 채취장소가 아닌 갯벌에는 들어가지 마십시오”라고 당부하자 모였던 조합원들이 갯밭으로 흩어졌다.

황도에서 5대째 살고 있는 주민 홍길용 씨(당시 72세)도 아내와 함께 바지락을 찾아 나섰다. 그는 한때 서해바다가 비좁다며 안강망 배를 몰고 동중국해까지 가 갈치를 잡던 어부였다. 바지락을 캐는 호미, 그릇, 자루망 그리고 외발수레가 노부부를 도와줄 벗들이다. 지금이야 흙과 돌을 깔아 길을 만들어 바지락밭까지 경운기나 트럭이 들어올 수 있게 되었지만, 그때는 달랐다. 조합원들의 대부분은 노부부였는데, 이들은 바지락을 머리에 이거나 지게에 진 채, 경운기를 타고 10여 분을 달려왔던 바지락밭을 맨몸으로 오갔다. 다리는 물론 온 몸뚱이가 고물이 됐다. 돌아다니기보다는 갯벌에 털썩 주저앉아 호미질로 바지락을 채취하는 노인도 있다. 그래도 정해진 양을 채취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만큼 바지락이 지천이다. 어린 종패를 뿌리기도 하지만 채취하는 바지락의 크기와 장소 등을 엄격하게 관리하기 때문이다.

황도주민들이 처음부터 바지락밭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고기잡이를 하던 시절에는 개인이 마을어장을 독점하기도 했다. 나중에 이를 되찾기 위해 법정싸움까지 가기도 했다. 그때 함께했던 100여 가구가 조합을 만들어 황도갯밭을 일구고 확대해 나갔다. 이후 펜션 등이 들어오고 외지인도 늘어났지만 조합을 개방하지 않았던 것도 바지락밭을 찾고 일구는데 시간과 비용이 많이 투입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날 바지락 채취량은 40㎏이었다. 한 가구당 두 자루의 망이 주어졌다. 바지락 채취를 시작하는 시간은 같지만 마치는 시간은 능력에 따라 다르다. 정해진 양을 초과하면 어촌계에서 회수하기 때문에 더 캘 수도, 캘 이유도 없다. 판매용이 아닌 자가 소비용 바지락을 채취하기도 한다. 이렇게 채취한 바지락으로는 젓갈을 담아 자식들에게 보낸다. 바지락에 천일염을 섞어 10일 정도 숙성시킨다.

안면도와 황도를 잇는 옛 제방을 바닷물이 잘 통하는 연륙교로 바꾸고나서 바지락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 감성돔과 농어 등 고급어종도 곧잘 잡힌다. 태안에는 황도 외에도 법산리, 정산포 마을의 바지락이 유명하다. 모두 일본으로 수출되는 바지락들이다.

 

바지락 채취
바지락 채취
채취한 바지락
채취한 바지락

청어잡다, 조기잡다

황도에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청어잡이였다. 홍길용 씨는 할아버지가 어살(물고기를 잡기 위해 물 속에 둘러 꽂은 나무 울)을 설치해 청어와 조기를 잡아먹고 살았다고 기억했다. 황도와 안면도 일대의 소나무를 베어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그물을 매 청어를 잡는 것이다. 청어가 뜸해질 무렵에는 조기가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기가 끝날 즈음엔 배를 가지고 가오리를 잡았다. 가오리 잡이는 ‘주낙’이라 부르는 어법으로 연승어업을 말한다. 가오리는 충청도에서는 ‘갱개미’라고도 부르고, 간재미라고도 부른다. 봄부터 여름 전까지 간재미를 잡았고, 밭에 보리와 고구마를 심어 주식으로 삼았다.

 

황도리 전경
황도리 전경

황도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안강망’으로 고기를 잡던 시기였다. 이때 황도는 부자섬이라고 불렸다. 안강망을 이용한 조기와 갈치잡이는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황도의 안강망어선(풍선배)은 조기잡이를 위해 연평도를 지나 황해도 구월까지 올라갔다. 풍선배에 안강망을 갖추고 갔다가 북한 주민들과 다툼도 많았다고 한다. 1960년대에는 설 쇠고 소흑산도(가거도)까지 내려가 조기를 잡기 시작했다. 그렇게 2월에 조업을 시작하면 5월 연평도에 이르러 조기잡이가 끝났다. 한번 나가면 두세 달은 기본이었다. 조기잡이가 시작되면 황도에는 여자들하고 할아버지들만 남았다. 조기잡이가 끝나는 가을이 되면 갈치잡이를 시작했다. 그리고 겨울에는 남쪽으로 내려가 새우잡이를 했으니까 남자들은 도통 집에 들어올 틈이 없었다. 남쪽에 어기가 시작되면 목포에 황도사람들 200여 명이 모여 살기도 했다. 홍 씨는 목포 뒷골목 술집, 여관 등을 줄줄 외고 있었다. 선원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경찰, 해경 등과도 친했다. 1990년대 초반 황도에 안강망배가 12척 있었다. 한 척에 7~8명의 선원이 일한다고하면 100여 명의 선원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당시 황도 주민들은 모두 안강망배에 의지해 생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을에서 선주의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황도는 한때 충남에서 안강망 어선세력이 제일이었지만 조기는 물론 갈치도 연안에서 조업하기 어렵고, 큰 배들이 유통과 가공 중심인 목포, 인천, 군산, 여수 등 대도시로 모이기 시작하며 운영난에 직면하게 됐다. 인건비는 오르고 어획량은 줄고, 안강망배로 일년을 더 버티면 2~3억 빚을 늘리는 꼴이 되었다.

 

1990년대초까지 황도에 있었던 안강망어선
1990년대초까지 황도에 있었던 안강망어선

서해 풍어제의 백미, 황도붕기풍어제

동해에 별신굿이 있다면 서해엔 풍어제가 있다. 마을마다 크고 작은 풍어제가 정월 보름을 전후해서 개최됐었지만 지금은 겨우 수협 지원을 받아 목포, 군산, 보령, 인천 등 몇몇 큰 위판장에서만 명맥을 잇고 있다. 마을굿으로 풍어제를 이어가는 곳은 전국을 살펴봐도 손에 꼽을 정도다.

원래 황도 마을굿은 ‘도당굿’이었다. 마을굿으로는 전라도 당산굿, 경기 도당굿, 강화도 고창굿, 동해 별신굿 등이 있다. 도당은 마을에서 최고신이 자리한 곳을 칭하는 말이다. 경기도 일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굿이다. 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제의를 지낸 후 마을잔치를 펼치기도 한다.

 

소를 잡고 제물을 준비해 제당으로 운반하는 모습
소를 잡고 제물을 준비해 제당으로 운반하는 모습

처음에는 안면읍의 당을 지키는 무녀가 제의를 주관했다. 1983년부터 황해도 만신 김금화 만신이 주관하면서 ‘황해도굿’풍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1990년대 초,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면서 황도 도당굿이 붕기풍어제로 각색·연출됐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고기잡이에 나갔던 배가 길을 잃었을 때, 마을에서 불을 밝혀주어 무사히 배가 돌아올 수 있었고 그 뒤로 당제를 지내게 됐다고. 처음에는 흰옷을 입은 성황님을 모셨는데, 지금은 ‘뱀서낭’ 임경업 장군을 모신다. 산신당에서는 사해용왕장군님을과 칼을 찬 군왕장군, 삼불님 등을 모시고 있다. 지금도 정월초가 되면 술을 빚고, 소를 잡아 만신을 모셔와 풍어제를 지낸다. 다만 만선 대신 바지락밭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것이 달라졌을 뿐이다. 

 

황도중기풍어제 1970년대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고 촬영한 기념사진
황도중기풍어제 1970년대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고 촬영한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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