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㊶ 해양문화가 궁금하거든, 동삼동으로 가라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㊶ 해양문화가 궁금하거든, 동삼동으로 가라
  • 김준 박사
  • 승인 2021.07.16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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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현대해양] 동삼동은 부산광역시 영도구에 있다. 영도 동쪽에 있는 상리, 중리, 하리 세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하지만 이 세 마을 외에도 섬덤마을, 아치섬마을, 진내마을, 흑암마을이 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기, 경제개발 시기를 지나면서 사람도 늘고 마을도 형성되었다. 상리마을에서 발견된 패총으로 보아 부산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리는 영도에서 가장 크고 좋은 어항을 가지고 있으며, 면적과 해안선도 영도구 절반을 차지한다. 봉래산과 태종산이 남북에 있고, 해안은 상리와 중리 마을 연안을 제외하면 태종대처럼 해식애가 발달한 바위 해안이다. 동쪽에 위치한 조도(아치섬)가 파도와 바람을 막아주어 일찍부터 상리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일대 매립간척 자리에 국립해양박물관, 한국해양연구원, 한국해양수산개발원, 국립해양조사원, 한국해양대학교 등이 자리했다.

봉래산 동쪽 부산항대교와 청학동과 동삼동
봉래산 동쪽 부산항대교와 청학동과 동삼동

 

동삼동 패총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선사시대 인류에게 어로활동은 중요한 생업수단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패총유적이다. 패총은 선사시대 인류가 식량으로 채취해 먹고 버린 조개껍질이 오랫동안 쌓여 만들어진 유적이다. 흔히 조개무덤 혹은 조개무지라고 부른다. 동삼동 외에도 오이도, 안도, 연대도, 상노대도 등의 연안과 강하구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패총에는 식량으로 이용한 육상동물, 물고기, 바다동물 뼈만 아니라 어구, 토제품, 석기, 집자리, 화덕시설 등이 남아 있어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동삼동 패총은 1930년대 일본인 요고야마와 오이가와에 의해 처음 발견돼 시굴조사됐다. 그 후 1960년대 미국인 모아와 샘플이 시굴조사를 했고, 1969년부터 1971년까지 세 차례 국립중앙박물관 발굴조사, 1999년 부산박물관 패총정화지역 발굴조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동삼패총전시관을 개관했다.

동삼동 패총 유물로 빗살무늬토기, 석기류 그리고 동물뼈와 생선뼈가 발굴됐다. 이곳 패총은 8천 년 전부터 3천 년 전까지 다섯 지층으로 나눠져 있다. 수렵과 어로 도구를 보면, 흑요석제 화살촉, 작살, 낚싯바늘, 빗창, 그물 등이다. 생활도구로는 돌도끼, 돌끌, 돌망치, 숫돌, 송곳, 첨두기(구멍을 뚫는 도구), 바늘 등이 확인됐다. 토기, 석기, 흑요석 등으로 보아 이들은 바다 건너 일본, 대마도, 제주 등과 직접 교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바닷가에서 어떤 어패류와 바다동물을 포획했을까. 도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물, 낚시, 작살을 이용해 연안의 어패류, 깊은 바다의 고래류 및 포유동물을 포획했다. 어패류는 현대인이 먹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큰구슬우렁이, 복어, 가오리, 흑돔, 보말, 홍합, 방어, 참굴, 가무락조개, 눈알고둥, 백합, 참돔, 전복, 소라, 다랑어, 맵사리고둥, 삼치, 배말, 대구, 넙치, 숭어, 피조개, 가리비, 성게 등이다.

동삼동 패총인들은 조개껍질을 이용해 팔찌를 만들고, 동물뼈, 이빨, 조개, 옥, 돌, 흙 등을 재료로 목걸이, 팔찌, 귀걸이 등 장신구를 만들었다. 특히 풍요, 다산, 안전을 기원하는 신앙의례로 곰모양토우, 조개가면, 사슴선각문토기, 사슴문양 등이 확인됐다.

동삼동패총에서 발굴된 토기편에 새겨진 그물자국으로 신석기시대 그물을 사용해 물고기를 잡았음을 알 수 있다(동삼동패총전시관)
동삼동패총에서 발굴된 토기편에 새겨진 그물자국으로 신석기시대 그물을 사용해 물고기를 잡았음을 알 수 있다(동삼동패총전시관)
패총박물관에 전시된 신석기시대 사용한 낚시
패총박물관에 전시된 신석기시대 사용한 낚시

 

봉래산에 오르다

영도를 상징하는 봉래산은 손봉, 자봉, 봉래산 정상 조봉 세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조망하기 좋은 곳은 손봉과 정상이다. 손봉은 동삼동, 조도, 오륙도, 해운대까지 펼쳐진다. 그리고 맞은편으로는 부산항과 부산항대교가 보인다. 정상에서는 부산항이 더 가깝다. 그리고 부산항대교와 중구, 서구, 자갈치시장, 용두산타워도 볼 수 있다. 특히 날씨가 좋은 날엔 대마도가 보인다. 봉래산엔 정상으로 가는 길 외에 임도와 자연생태학습장 그리고 절과 산제당을 잇는 둘레길이 있다. 중간에 체육공원과 약수터가 있어 아침운동이나 산책을 하는 주민들이 많다. 정상에 오르는 길도 반나절이면 올라갔다 내려올 수 있다.

봉래산이라는 지명은 절영진 3대 첨사 임익준이 ‘봉황이 날아든 산세’라 붙였다고 한다. 중국전설에 나오는 삼신산 가운데 하나로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는 신선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산 모양이 고깔을 닮아 고깔산이라 했다고 하나, 사실은 물이 귀해 목이 마르다는 의미인 ‘고갈산’이었다가 봉래산으로 바뀌었다.

봉래산 정상에 오른 사람 10명 중 대여섯 명은 ‘할매바위’ 앞에서 두 손 모아 인사를 한다. 모자를 벗고 할매에게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다. 가끔 사람들이 많으면 차례를 기다리기도 한다. 민간신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진다. 봉래산에 올라온 사람이 영도사람인가 아닌가를 구별하는 방법이다. 영도할매를 보면서 자꾸 동삼동 해녀촌에서 만난 해녀할망이 떠올랐다.

영도할매는 산삼과 불로초를 기르며 영도 사람들을 지켜준다고 한다. 영도 사람들과 영도에 살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에게 섬살이를 이겨내는 힘을 준다. 주민들은 영도를 떠난 자식들 안부를 걱정할 때도 영도할매를 찾았고, 고향을 방문하거나 떠날 때도 할매에게 들렀다. 자연스럽게 영도할매는 봉래산 산신이 되었고, 주민의 삼신할매로 자리했다. 가끔 외지인들이 등산을 와서 할매바위 위에 올라가거나 걸터 앉았다가 주민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일도 있다.

봉래산 정상과 할매바위
봉래산 정상과 할매바위

 

영도등대 불을 밝히다

동삼동 남쪽 끝에 영도등대가 있다. 1906년 12월 1일 점등했다. 부산에는 영도등대와 가덕도등대 두 곳의 유인등대가 있다. 오륙도등대는 1937년 11월 유인등대로 점등했지만 2017년 4월 무인등대로 전환했다.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는 제뢰등대다. 1905년 5월 세워졌다. 영도등대는 18초 안에 3번의 불빛이 반짝이는 등대다. 이 신호가 영도등대 표식이다. 맞은편 오륙도 등대는 10초에 1섬광이다. 오가는 배들에게 위치를 알리는 항로표지에는 광파표지(빛) 외에 형상표지(색, 모양), 음파표지(소리), 전파표지 등이 있다. 등대를 관리하는 사람을 ‘향로표지관리원’이라 한다. 영도등대 주변엔 갤러리와 도서관과 전망대를 설치해 해양친수문화공간으로 바꿨다. 등대를 따라 내려가면 벼랑 위 카페가 보이고, 바닷가엔 해녀들의 횟집 포장마차가 보인다. 등대 앞으로는 부산항에서 컨테이너 화물을 가득 싣고 나오는 화물선이 느리게 지나간다. 횟집에서 막 썰어온 싱싱한 회와 술을 담은 쟁반을 들고, 사진찍기 좋은 장소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연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아슬아슬한 갯바위 위에 서서 한 장 사진을 위해 온갖 포즈를 취하는 젊은이도 있다. 등대가 있는 태종대는 낚시터, 데이트장소, 야유회장소이자 해녀들의 물질하는 바당이었다. 여행객들이 모이자 인공해수풀장을 만들었다. ‘곤포의 집’이다. 그 뒤에는 청룡열차, 바이킹, 사격연습장 등 놀이시설을 갖춘 자유랜드가 문을 열었다. 모두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영도등대
영도등대
태종대와 신선바위
태종대와 신선바위

 

제주해녀, 영도로 모였다

전국에 물질을 하는 해녀는 약 1만 여 명으로 추정한다. 그 중 절반은 제주에, 나머지는 경북, 충남, 부산, 강원, 전남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부산에 있는 약 8백여 명 중 100여 명이 영도에서 물질을 한다. 한때 기장, 가덕도, 다대포, 수영구, 해운대, 영도 등에서 2,000여 명이 물질을 했다. 제주도도 그렇지만 부산에 남아 있는 해녀들은 대부분 70대를 훌쩍 넘은 고령이다. 대부분 제주에서 뭍으로 ‘바깥물질’을 나온 분들이다. 이렇게 나왔다가 현지에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정착했다.

그런데 왜 영도였을까. 제주해녀들이 완도, 여수, 삼천포, 통영, 거제를 두고 영도로 모여든 이유가 뭘까. 당시 부산에는 해조를 수집해 유통하는 객주들이 많았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상인과 수산회사가 자리를 잡고 전쟁에 필요한 우뭇가사리나 감태 등을 수집해 일본으로 보냈다. 또 영도는 동해와 남해 등 물질할 ‘바당’을 찾아 나서는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물질을 마치고 제주도로 귀향을 할 때 생필품이나 선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시장이 있었다. 최근 도시가 확장되고 항만개발과 해안도로가 만들어지면서 물질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이 줄어들었다. 지금도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어, 영도가 부산해녀들에게 마지막 섬이 될 수도 있다.

최근 동삼동 중리마을 바닷가에 해녀문화전시관이 문을 열었다. 부산사람들에게 ‘중리해녀촌’으로 알려진 곳이다. 해녀문화전시관 1층은 해녀(청학동, 봉래동, 동삼동)들이 장사를 하는 식당이고, 2층은 전시관이다. 영도 북서쪽에 위치한 청학동과 봉래동과 접한 바다가 매립과 간척으로 사라지면서 해녀들이 이주해 왔다. 이렇게 해녀식당에는 한 지붕 세 가족이 물질을 하고, 채취한 것을 간단하게 조리해 판매하고 있다. 해녀의 수는 10여 년 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고, 남은 사람들도 70대 중후반으로 10년 후면 몇명이나 물질을 할지 알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동삼동해녀문화전시관>이 갖는 의미는 크다. 하지만 아쉽게 해녀식당과 절영해안산책로를 찾는 사람은 많지만 전시관까지 찾아오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만큼 적다. 우리나라 해양문화를 전시하고 연구하는 국립해양박물관, 선사시대 해양와 어촌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동삼동패총박물관, 마을해녀 문화를 살피고 직접 만날 수도 있는 곳이 동삼동이다. 이들을 연계한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동삼동해녀문화전시관 앞 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
동삼동해녀문화전시관 앞 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

 

동삼동해녀문화전시관 내부
동삼동해녀문화전시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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