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가 주는 교훈
‘자산어보’가 주는 교훈
  •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 승인 2021.04.26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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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산어보’를 보고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현대해양] 이 영화는 19세기 초 흑산도에 귀양 간 유학자 정약전의 어류도감 자산어보에 얽힌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역사적 사안들을 영화에 담아 청중에게 재미를 제공한다.

특히 그 시대 최고의 지성인으로 알려진 동생 정약용과 형 정약전을 대비시키고, 약전(설경구)이라는 양반과 쌍놈이라는 창대, 성리학과 서학을 대칭으로 놓으면서 영화의 스토리를 풍부하게 한다.

 

연구 대상을 실물에 두었던 약전

19세기 초엽의 사회상이다. 3형제는 서학을 받아들였다고 하여 조카사위인 황사영 백서사건과 연루되어 1801년 순조가 즉위하자 잡혀와 문초를 당한다. 약전과 약용은 머나먼 남해땅으로 유배를 떠난다. 약용은 뭍인 강진에 가지만 약전은 흑산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한때 병조좌랑을 지낸 약전은 좌절하여 외딴 섬마을에서 무료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창대라는 서얼을 만나 흑산도에 나는 물고기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창대의 설명과 자신의 관찰을 토대로 한 마리 한 마리 기록을 남긴다.

약전은 그 기록을 완성하는 것을 삶의 큰 목표로 삼는다. 그는 어선에 직접 승선하여 고기의 생태를 관찰한다. 고기를 해부하는 장면을 통하여 알게 된 것을 기록에 남긴다. 14년 귀양살이를 통하여 약전은 자산어보라는 해양생물학사전을 남겼고 본 영화에 스토리를 제공했다.

동생 약용은 목민심서와 같은 처세에 관한 책을 집필한 반면, 약전은 자신의 연구 대상을 실물에 두었다. 영화는 약전의 입을 통해 그러한 연구가 당시 조선 사회에서 유의미한 것임을 알린다. 성리학의 전통에 갇혀있던 조선 선비들은 형이상학적인 인간의 도리, 살아가는 방법, 충효 등에 관심을 가졌다.

물고기를 자세히 관찰하여 어류도감을 만든다는 것은 당시 지배층의 공부방식과 아주 다른 공부의 방법이었다. 이는 그 형제들이 학문적인 호기심이 많고, 깊이 연구하는 성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산어보를 만들어 어디에 쓰겠느냐고 창대가 비웃자, 약전은 말한다. “일본은 조총을 배워서 1592년 임진왜란에 사용했다. 고기를 기록해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알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에서도 바다에 떠내려 온 지구의를 익힌 사람들은 말한다. 흑산도에서 나는 고기를 외국으로 가져가면 몇 곱절이 되는 고기값을 받을 수 있다고. 이는 무역을 말하는 것이다. 목포 지방에 유명한 상인 문순덕이 영화에 나온다. 소흑산도에 사는 홍어장사인 문순덕이라는 상인이 표류하여 오끼나와와 필리핀을 거쳐서 중국의 내륙 곳곳을 지나 우리나라에 귀국한 다음 제주도에 표류한 필리핀인들에 대한 통역을 해준 이야기를 흑산도에 와서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약전은 표해시말이라는 제목의 책을 만들어준다.

표해시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18세기 초엽의 조선, 오끼나와, 필리핀, 중국에 대한 사회상을 전해주는 아주 귀한 자료이다. 서울 한양에서 천리고도이지만 주민들의 세계관이 한양의 고관대작보다 넓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지지세력이 미약했던 실학

정약용은 정조 시절 수원성을 축조할 때 이미 기중기를 사용했다. 정약전은 흑산도에 사는 물고기를 자세히 관찰하여 과학자의 눈으로 훌륭한 책을 남겼다. 모두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실생활과 연결되는 것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실학의 기운이 박규수 등을 통해 구한말로 이어졌지만 그 세력은 미미했다. 그래서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정체를 한꺼번에 바꾸려했지만, 지지세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1800년대 초반에 서양이 존재함을 알고 서학이라는 것이 들어왔을 때 서양의 앞선 문물을 적극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우리나라는 구체제에 머물고 있었다. 실학의 움직임이 자강운동으로 이어지지 못한 점은 매우 안타깝다. 외국 상선이 나타나고 개방을 요구했을 때 지배층은 개방을 거부했다. 지배층은 쇄국을 지지하는 세력이 주를 이루었고 개방과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은 소수였다. 외세의 힘에 의하여 외국에 문호를 개방했지만 이미 조선은 산업혁명에 의하여 앞서가던 서구와 일본에 비하여 약한 국가였다.

서양에서 오는 상선은 조류를 타고 일본의 규슈지방으로 가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표류한 경우에만 도착하게 되는 바닷길이다. 16세기부터 일본은 서양의 상선이 도착하면 호기심을 가지고 그 들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나가사끼에 데지마라는 외국인 거주구역을 두어서 그들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로서 기능하게 했다. 19세기에는 난학(蘭学)이 일본의 규슈지방에는 상당한 정도로 퍼져있었고, 선각자들은 학교를 만들어 서양학문을 가르쳤다. 이것이 외세가 쳐들어오자 1868년 명치유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명치유신이 성공한 것은 서양에 대한 인식과 개방정책의 필요성이 일본의 지배층에 상당부분 공유된 것에 기인한다고 본다.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약전과 약용 형제와 같이 실학의 기운이 더 살아나서 백성의 삶에 도움이 되는 기술들을 개발하고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운동을 펼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귀양지에서도 실학을 추구한 약전

영화는 창대를 통해 당시 조선시대가 신분사회였음을 말한다. 서얼이 가졌던 고통을 이해할 만하다. 영화에서는 가렴주구(苛斂誅求)하는 나주목사와 같은 부패한 조선의 양반이 있는가하면, 귀양을 가서도 무언가 글로 남기어 세상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한 양반들이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선의 지식인들 중에서는 무언가를 하고자 했다. 이런 지식인들의 움직임이 19세기 초엽부터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것이 힘을 얻어 전국적인 개혁운동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실학의 기운이 일어났던 1800년대에서 1860년 사이에 정약용과 정약전과 같은 실학자들이 더 많아지고 그들의 연구결과인 지식이 공유되고 산업의 발전을 통하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목표가 지배층에 뚜렷했다면 조선도 많이 달라졌을 터인데하는 생각을 해본다. 영화는 19세기 초엽의 조선 땅에서 귀양을 가서도 변화를 추구하고 사람들의 삶에 도움을 주려고한 한 지식인이 있었음을 우리에게 알린다.

약전이 사는 초가집 마루를 통하여 시원한 바다를 만날 수 있는데, 흑백의 색상과 함께 이 영화에 품격을 더한다. ()는 검다는 뜻이고 자산(玆山)은 흑산의 격조 높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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