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㊳ 구룡포에 배 들어온다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㊳ 구룡포에 배 들어온다
  • 김준 박사
  • 승인 2021.04.13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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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구룡포_➋
구룡포항의 일출
구룡포항의 일출

[현대해양] 동해의 아침 해는 붉지 않다. 말간 해가 떠오를 즈음에 어장에 나간 배들이 하나 둘 포구로 돌아온다. 그렇게 구룡포의 아침은 깨어난다. 백고둥(표준명 물레고둥)을 먼저 배에서 내렸다. 동해에서 만날 수 있는 고둥이다. 삶아 먹어도 좋지만 구우면 더 맛있다. 중독성이 있다. 순식간에 고둥 위판이 끝났다. 해가 뜨기 전에 이뤄진다. 한 시간 후 기다리던 대게 위판이 시작되었다. 대게를 사려는 사람도 위판을 지켜본다. 위판을 알리는 방송과 함께 선원들은 배 밑 어창에서 대게를 꺼내서 신속히 다리가 위로 향하게 해서 바닥에 줄지어 놓는다. 위판이 끝나면 곧바로 운반한다. 추울 때는 조금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리기도 한다. 날씨가 추우면 게들이 서로 부딪히거나 운반 중 다리가 부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리가 온전하기 않으면 값이 뚝 떨어진다. 예를 들어 한 마리 10만원 하는 박달대게가 7만원이나 6만원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대게는 다리가 값을 결정한다. 위판이 끝나자 포구에 다시 적막히 흐른다. 대신에 골목시장은 비로소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과메기 하늘로 승천하다?

왜 구룡포라 했을까. 신라 진흥왕 때, 장기현감이 용주리(현 구룡포 6리)를 지날 때였다. 돌연히 천둥이 치고 폭풍우가 몰아치더니 용 열 마리가 승천했다. 그 중 한 마리는 끝내 오르지 못하고 떨어졌다. 구룡포의 지명설화다. 바다에 떨어진 용이 과메기로 변한 것일까. 요즘 구룡포는 과메기로 승천하고 있다. 지천으로 잡히던 청어를 두고두고 먹기 위해 바닷가에 걸어서 숙성시킨 것이 효시였다. 지금은 구룡포를 넘어 포항의 경제를 이끄는 수백 억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지역산업이 되었다. 과메기가 만들어내는 관광산업을 비롯한 파급효과까지 고려하면 그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

과메기 덕장을 찾아 삼정리로 가는 길에 만난 어머니가 진짜 과메기는 ‘통과메기’라며 권했다. 척추를 따라 반으로 잘라 사나흘 말리는 과메기와는 품격이 다르다고 했다. 껍질을 벗기자 붉은 속살이 드러났다. 쭉 찢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비릿할 것으로 알았는데 그냥 먹어도 맛이 좋았다. 달짝지근하고 씹힘이 기분 좋았다. 국산 꽁치만 사용한다고 붙잡는 집도 있었다. 그럼 대부분 수입산을 많이 사용한다는 말이다. 과메기는 ‘통마리’와 ‘배지기’ 두 가지 방식으로 숙성된다. 통마리는 내장을 제거하지 않고 세척해서 굴비처럼 엮어 말리는 것이다.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보름 정도 말려야 한다. 배지기는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한 후 세척을 해서 대나무(꼬치)에 걸어 말리는 것이다. 과메기는 온도가 중요하다. 영하 5도에서 영상 5의 기온이 유지되어야 하고, 바람이 잘 부는 곳이 좋다. 이런 조건에서 과메기가 숙성된다. 삼정리 바닷가에는 과메기 덕장을 가득 찼다. ‘우럭돌과메기’라고 유명한 곳이다. 요즘은 건조기와 자연건조를 함께 이용하고 있다.

구룡포에는 400여 개의 과메기 가공업체가 있다. 청어에서 꽁치로, 다시 청어로 과메기 재료는 바다사정에 따라 바뀌고 있다. 바다가 주는 대로 사정에 맞춰야 하는 것인 어촌마을 사람들의 운명이자 삶이기도 하다. 과메기는 구룡포는 포항지역 경제를 지탱하는 효자로 자리를 잡았다. 혹자들은 제철로 인해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많다고 한다. 영일만의 풍부한 어장과 어촌문화가 사라졌다는 점이 대표적으로 잃은 것이다. 구룡포에서 잃어버린 포항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 구룡포에 과메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룻밤만 구룡포에 머물면 그곳에 해산물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 수 있다. 비릿함으로 가득한 선창이다. 포구와 위판장은 말할 것도 없고, 골목 식당에서도, 허름한 일본건물 술집에서도, 멋스럽게 고친 카페에서도, 심지어 허리를 구부리가 새벽시장을 나서는 할머니 뒷모습에도 비린내가 따른다.

구룡포 전경
구룡포 전경

 

구룡포 바다밭 주인들, 해녀

경상북도는 제주도 다음으로 해녀들이 많은 곳이다. 대부분 제주에서 출가해 자리를 잡은 어머니들이다. 몇 명의 해녀들이 갈매기의 응원을 받으며 물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길이 간 곳은 물질하는 해녀들이 아니라 바닷가에서 밀려온 미역을 줍는 늙은 해녀였다. 그녀에게도 한 때 저 바다를 품에 안을 듯 물질하던 상군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비록 바닷가에서 떨어져 나온 미역가닥이나 줍는 신세지만 화려했던 시절이 있었다. 구룡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고향을 떠나 구룡포에 자리를 잡은 것은 미역을 채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에는 양식미역이 없었고, 모두 자연산 돌미역에 의지하던 때였다. 베이비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아이를 많이 낳던 시절이다. 그만큼 미역수요도 많았다. 미역이 자라는 바위를 ‘미역짬’이라고 한다. 미역짬은 마치 농사를 짓는 논밭과 같아서 사고 팔리기도 했다. 찬바람이 날 무렵이면 미역짬에 미역이 잘 붙도록 잡초를 제거했다. 이를 ‘기세작업’이라 한다. 갯딱기라고도 한다. 긴 장대에 납작한 쇠붙이를 붙여 갯바위를 쓱쓱 밀어서 해초를 제거한다. 마치 밭에서 잡초를 제거하고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겉으로 드러난 갯바위만 아니라 물속에 있는 갯바위도 해녀들이 호미를 가지고 들어가 제거한다. 그렇게 작업을 한 바위와 그렇지 않은 바위의 미역 채취량은 몇 배나 차이가 난다. 그래서 일당을 지급하며 해녀에게 작업을 부탁하는 것이다. 특히 개인 미역바위(곽암)의 경우에는 더욱 정성을 들여서 기세작업을 한다. 마을공동체에서 미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컸다는 증거다. 해녀들이 작업을 하는 곳은 마을공동어장으로 ‘마을어업’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해녀들은 미역 외에 소라, 성게, 군소, 문어, 해삼, 홍합 등을 채취한다. 예전만큼 많은 양은 아니지만 제 역할을 하고 있다. 해녀들은 허리가 아프고 걷는 것도 불편하지만 바다에 나간다. 그곳이 그녀들에게 자유로운 곳이요, 모든 것을 잊고 몰입하는 공간인 탓이다. 그 힘으로 평생 물질을 하며 자식을 가르치고 도시로 보냈다. 여름에는 일주일에 사나흘, 겨울에도 하루 정도는 물질을 한다.

미역바위를 닦아 미역포자가 잘 붙도록 하는 해녀들과 어민
미역바위를 닦아 미역포자가 잘 붙도록 하는 해녀들과 어민

구룡포 모리국수

구룡포에는 꽤 인기가 높은 ‘모리국수’가 있다. 원조집이 그렇듯 모리국수도 언제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모리국수가 구룡포에서 화려하게 재탄생한 것은 2004년 구룡포에 머물며 시를 짓는 권선희 시인이 한 모리국수집을 소개하면서다. 그리고 10여 곳의 모리국수집이 문을 열었다. 모리국수의 특징은 해물로 육수를 만든다는 점, 고춧가루를 넣어 얼큰하게 끓인다는 점, 여럿이 먹는다는 점이다. 그 특징으로만 보아도 뱃사람들의 허기를 달래는데 안성맞춤이다. 그날 잡은 생선 중 남은 것을 넣고 국수와 함께 끓인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돈이 되는 해산물은 넘기고 남은 것이 아귀나 장치나 곰치(미거지) 등이었다. 생긴 것으로 보면 혐오스럽기까지 하지만 머리가 크고 살이 팍팍하지 않으니 국물을 내기 좋고 국수와 잘 어울리는 생선들이다. 여기에 상품이 떨어지는 홍게나 대게 발도 더했다. 홍합이나 대합을 넣기도 했다.

 

주민들과 선원들이 일을 마치고 허기를 달래던 국수집이었는데 이젠 줄을 서서 기다려야 맛을 볼 수 있다. 좀 한가한 집을 찾아 들어갔다. 1인분은 주문을 할 수 없다. 2인분을 먹겠다고 주문하며 자리에 앉았다. 모리는 구룡포말로 ‘모디서’ 먹는 음식이란다. 적어도 네 명은 되어야 국물도 맛이 난다는 것이다. 팔고 남은 해산물을 모디 넣어 만든 것이라고도 한다. 무슨 음식인지 이름을 몰라 ‘내도 모린다’해서 붙여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지금은 구룡포에 국수공장이 한 개만 남았지만 한창때는 여덟 개나 있었다. 그만큼 장사가 잘 되었다. 공장국수만 아니라 칼국수를 넣어 모리국수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배고픈 시절, 쌀이 부족한 시절, 밀농사를 많이 재배하던 시절, 바닷가에서 쉬이 구할 수 있는 생선에 칼국수를 넣어 끓여 먹었던 것이 시작일 수 있다. 안동에서는 은어를 넣었고, 주문진에서는 양미리를 넣어 국수를 삶았다. 배를 타는 동사(어민)들이 함께 먹었지만 그 자리에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노동자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덕장에 걸린 아귀
덕장에 걸린 아귀

오래전 구룡포해수욕장에서 보았던 오징어를 잊을 수 없다. 구룡포항에서 호미곶 방면으로 나서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해수욕장이다. 그 백사장 건조대에 손질한 오징어가 가득 걸려 있었다. 왕방울만한 눈이 바닥에 널려 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이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렇게 오징어가 널려 있는 모습을 마주하기 어렵다. 그 자리에 아귀가 널려 있다. 이외에 물가자미라 부르는 ‘기름가자미’, 복어, 도루묵, 닭새우, 붉새우, 고동 그리고 혼획된 고래까지 모두 밥상에 오르는 곳이 구룡포다. 뒷골목을 거닐었다. 일본인가옥거리가 생기고, 드라마에 소개되면서 많은 구룡포를 찾는 여행객들이 많다. 더불어 아련한 기억을 간직한 시간의 흔적들이 포장된 상흔으로 하나둘 채워지고 있다.

 

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미주구리’라 불리는 기름가자미
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미주구리’라 불리는 기름가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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