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㊲ 구룡포가 꿈틀댄다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㊲ 구룡포가 꿈틀댄다
  • 김준 박사
  • 승인 2021.03.15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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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구룡포 ➊
2012년 만들어진 일본인가옥거리
2012년 만들어진 일본인가옥거리

[현대해양] 경북 포항시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 젊은 유튜버가 카메라를 들고 지나간다. 계단을 지나 ‘동백이네 집’으로 향한다. 한 시간 남짓 서성거리는 사이에 세 명 째다. ‘동백꽃 필 무렵’ 드라마가 방영되고 ‘카멜리아’ 앞은 사진 찍기 위한 사람들이 늘어서고 일본인가옥거리에도 젊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구룡포 포구 뒷골목에 있는 일본인가옥들과 좁은 골목길, 공원 등이 구룡포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널리 알려진 구룡포과메기 외에 대게, 모리국수 등도 인기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으면서 기존에 있던 다방과 다른 커피숍도 생겨났다. 주민과 외국인 선원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던 뒷골목 술집과 식당들은 여행객을 위한 가게들로 바뀌기도 했다. 이렇게 활기가 넘치는 거리로 바뀐 것은 ‘일본인가옥’ 거리가 조성되면서다. 대형관광버스는 보기 어렵지만 구룡포를 여행하는 연령층은 중장년층에서 젊은 청소년, 연인, 가족 등으로 다양해졌다. 구룡포에는 어떤 이유로 일본인가옥이 만들어졌을까.

 

TV 동백꽃이 필 무렵의 동백이네 집
TV 동백꽃이 필 무렵의 동백이네 집

 

왜 구룡포였을까

구룡포에 일본인 어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반이다. 1902년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도미 연승어선 50여 척이 들어오면서부터다. 조선시대에도 일본인들이 들어와 조업을 하고 때로는 약탈을 하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구룡포 바다에서 조업하면 만선을 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1904년과 1906년 가가와현(香川縣)에서 도미 연승어선과 삼치 유망어선과 고등어유망어선이 들어왔다. 기존에 우리 해역에 출어해 조업을 하고 돌아가는 통어에서 1906년 통감부 정치가 시작되면서 집단으로 이주해 일본인 이주어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당시 구룡포에 거주하는 일본인 70%가 가가와현 출신으로 구룡포가 가가와촌이라 할 정도였다. 그리고 1912년에는 가가와현조선해출어단 구룡포 출장소가 만들어졌고, 1922년에는 친목도모, 미풍양속 함양, 근검저축 등을 목적으로 ‘가가와현인회’가 만들어졌다.

그 중심에 지금은 구룡포근대역사관으로 이용하는 집 주인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가 있다. 그는 남해안에서 채취한 해조류와 도미와 고등어와 정어리 등 어류를 운반선에 싣고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 외에도 대부망, 건착장, 정어리 등 가공업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술, 곡물, 철강, 비료 사업에도 주주로 참여했다. 구룡포로 이주한 일본어민들은 자발적 이주자들이다. 구룡포만 아니라 거제 구조라, 장생포, 통영 남포, 고흥 축정항, 여수 거문도 등에도 일본인이 정착했다. 스스로 어장을 찾아 나선 사람들로 대부분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출신들이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도미와 삼치가 많이 잡힌다는 소문에 형제, 이웃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왜 이들 지역 어민들은 새로운 어장을 찾아야 했을까. 일본 명치어업법으로 인해 봉건영주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어민에게 어업권을 부여함에 따라 어촌의 어민들은 새로운 어장을 찾아야 했다. 또 구룡포나 남해안은 해양생태조건이 세토내해와 비슷해 같은 어구와 어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미 고려 때부터 약탈을 일삼았던 지역이라 낯익은 바다라는 점도 작용했으며, 뱃길로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를 지나 자신들의 고향을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

1930년대 제작된 구룡포 지도
1930년대 제작된 구룡포 지도

일본인 이주어촌이 만들어지다

일본인 어민들이 구룡포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1927년에는 일본인 이주자가 120호에 이르렀다. 지역도 가가와현 외에 오카야마현, 야마구치현, 나가사키현, 도토리현, 미에현 등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대부분이 어업인이었고, 고등어나 청어 성어기에는 구룡포항에 어선·운반선이 2000여 척에 이르렀다. 1933년에는 일본인은 230호 800명에 이르렀다. 이들 중 어업이 110호, 상업이 80호, 기타가 40호였다. 당시 구룡포 인구는 모두 738호 3,325명이었다. 구룡포에 일본인 인구가 늘어나면서 헌병분견대, 파출소, 우편소, 공립심사소학교 등이 설립됐다. 또 면사무소가 구룡포로 이전했다. 뿐만 아니라 포항과 구룡포 여객선이 구룡포에서 기항했다. 구룡포와 포항을 오가는 도로가 개설됐다. 일본인가옥거리에 상점, 병원, 극장, 당구장, 빵집, 목욕당, 택배회사가 자리를 잡았고, 유흥업소에는 일본인 게이샤 100여명 조선인 기생 50여명이 있었다. 1930년 큰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후 국고와 후원금으로 축항을 완공하기도 했다. 지금 여행객들이 오가는 일본인가옥 거리는 그때 만들어진 이주어촌 중 남아 있는 80여 채 가옥들이다.

구룡포 포구에서 일본인가옥거리 입구에 들어서면 곧바로 신사가 있었던 공원으로 가는 계단으로 이어진다. 계단을 앞에 두고 왼쪽과 오른쪽 길이 일본인가옥거리다. 왼쪽 골목으로 하시모토 겐기치가 살았던 집이 오롯이 남아 있다. 그 집은 구룡포 근대역사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하시모토 겐기치가 1920년대 가가와현에서 구룡포에 들어와 지은 2층 일본식 목조가옥이다. 이 집을 짓기 위해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가지고 왔다. 집의 모양만 아니라 다다미방, 부츠단, 고다쯔 등 일본인의 주거생활을 엿볼 수 있다.

 

구룡포 공원으로 가는 계단에서 본 일본인가옥거리 입구와 구룡포항
구룡포 공원으로 가는 계단에서 본 일본인가옥거리 입구와 구룡포항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

구룡포에서 눈여겨 봐야 할 곳은 하시모토 가옥만 아니다. 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석비, 도가와 야스브로 추모비, 용왕당, 충혼탑 등이 있다. 계단엔 왼쪽 59개, 오른쪽 61개의 석비가 세워져 있다. 계단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정면에는 1960년 구룡포공원을 정비하면서 후원한 사람과 단체명을 새겼다. 그 뒷면엔 1944년 신사일대를 증개축하면서 기부금을 낸 일본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해방 후 시멘트로 발라 확인할 수 없다. 공원에 일제강점기 세운 제국군인회 충혼탑의 기단도 해방 후 글씨를 지우고 대한민국 군인유족회 충혼탑 기단으로 재사용했다. 나중에 비판이 일자 새로 충혼탑을 만들었다. 충혼탑 옆에는 본래 작은 용왕당이 있었다. 지금은 같은 모양으로 단청을 하고 나란히 서 있어 안내판을 확인하지 않으면 모른다. 하시모토와 함께 구룡포의 일본인의 중심인물이 도가와 야스브로이다. 하시모토가 가가와현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도가와는 경북 평의회 회원, 경북수산회 부회장, 구룡포 어업조합장 등 경북을 대표하는 일본인이었다. 구룡포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갈등이 잦았던 두 인물은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후 축항공사를 하면서 타협을 했던 것 같다. 많은 국비를 확보하고 후원금을 확보해야하기 때문이었다. 하시모토는 구룡포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상인들에게서 기부금을 받고, 도가와는 인맥을 이용해 국비를 얻는 역할을 했다. 공원에 그의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 송덕비는 규화석으로 도가와 야스브로 고향에서 가져왔다. 해방후 송덕비 글씨가 시멘트로 발라졌다. 청년단에서 발랐다는 소문이 있다. 일본인가옥거리 위 공원 주변에는 신사, 우체국, 면사무소, 헌병대, 심상소학교 등이 모여 있었다. 1930년대 구룡포는 본정(本町), 행정(幸町), 시장통(市場通)으로 나누어졌다. 본정과 행정은 지금의 일본인가옥거리에 해당하고, 시장통에는 조선인이 살았다.

일제강점기 신사 기단과 현충사와 용왕당
일제강점기 신사 기단과 현충사와 용왕당

 

일본인가옥거리는 2011년 정비하고 포항시는 2012년 일본인가옥거리를 조성하고 구룡포근대역사관을 개관했다. 일본인이 살았던 건물을 고쳐서 찻집, 식당, 커피숍 그리고 일본전통의상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는 체험을 관광자원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아쉽다. 산뜻하게 정리를 했지만 100여 년의 시간이 지워진 느낌이다. 건물에는 옛날 건물사진과 설명이 붙어 있다.

일본인이 다녔던 심상소학교는 창작예술인을 위한 작업공간으로 바뀌었다
일본인이 다녔던 심상소학교는 창작예술인을 위한 작업공간으로 바뀌었다

이방인의 삶, 구룡포가 고향입니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태평양전쟁 무조건항복선언 이후 보름이 지나서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브유키(阿部 信行)가 하지준장이 준비한 ‘항복 조인식장’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이후 조선거주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구룡포에도 일본인들이 모여들었다. 지금의 구룡포수협 위판장에는 일본인들이 짐이 쌓아 두고 아무데나 일본인가옥에 들어가 배를 기다렸다. 구룡포만 아니라 경상북도 일대 일본인들도 몰려들었다. 여러 차례 운반선을 이용해 일본들은 구룡포를 빠져나갔다.

본국의 도착한 일본인들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다. 세토내해도 전쟁으로 어수선해 본국에 있던 사람들도 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전쟁 중이기도 했지만 어업과 상업을 했던 이들에게 어장은 예나 귀국한 후에나 삶터가 아니었다. 상업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조선에 살기 위해 이주했던 패망으로 귀국한 이들도 외지인이고 이방인이었다. 결국 구룡포에 살았던 일본인들은 일본 전국으로 뿔뿔이 살길을 찾아 흩어졌다. 고향도 고국도 모두 그들에게는 부질없는 곳이었다.

구룡포 시인 권선희는 구룡포이야기를 정리하다 서상호(작고, 당시 93세) 어르신을 만난다. 노인의 선친은 구룡포에 이주한 일본인 운전사였다. 일본인이 다녔던 심상소학교 아래 집이 있었다. 서 노인은 구룡포가 바라보이는 은행나무 아래서 시인에게 구룡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서 노인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일본에서 만난 ‘구룡포회’ 노인들에게도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공간과 이름들이 많았다. 그 무렵 부산에 있는 한 골동품 가게에서 일제강점기 구룡포 지도가 나왔다면서 포항시로 연락이 왔다. 그 지도에는 거리와 상가와 사진이 잘 그려져 있었다. 그렇게 의문으로 가득했던 씨줄날줄이 채워졌다. 그 지도는 일본인가옥거리와 공원에 있다. 이렇게 정리한 것이 2010년 발간된 <구룡포에 살았다>(공저)라는 책이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가 복원됐다.

구룡포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이 구룡포축제에 초대되기도 했다. 하시모토 젠기츠의 막내딸 히사요는 전쟁이 끝나 좋았지만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냥 기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녀에게 구룡포는 조선이나 일본이라는 국가를 떠나 태어난 고향이었다. 구룡포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관계가 마냥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구룡포 공원에서 본 일본인 가옥과 구룡포항
구룡포 공원에서 본 일본인 가옥과 구룡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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