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㊱ 그물 무게가 포구의 삶을 결정한다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㊱ 그물 무게가 포구의 삶을 결정한다
  • 김준 박사
  • 승인 2021.02.08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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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도루묵을 따는 어머니들
도루묵을 따는 어머니들

[현대해양] 겨울 양미리를 만나러 주문진읍으로 향했다. 배들은 보통 새벽 4시는 기본이고 3시30분이면 어김없이 바다로 나간다. 어종에 따라 반시간 혹은 한 시간 이상 어둠을 가르고 망망대해를 달려 그물을 보고 다시 그물을 넣고 포구로 돌아오면 새벽경매가 시작된다. 겨울바다 체감온도는 영하 20도 밑으로 떨어지는 날이 잦다. 이렇게 추워야 도루묵이 많이 나고 양미리도 풍년이다. 붉은홍게와 대게도 살이 꽉 찬다. 오징어배는 이틀 만에 돌아오기도 한다. 바다가 풍요로워야 주문진항은 활기를 띤다. 선주는 물론 외국인 선원들도, 해산물을 운반하는 손수레꾼도, 그물을 터는 사람도, 생선을 따는 사람도, 어시장 가게주인도, 택배포장을 하는 사람도, 시장커피를 파는 어머니도, 곰치국을 끓이는 식당도 수런수런 활기로 가득하다. 그물의 무게가 주문진 사람들의 삶을 결정한다.

곰치국
곰치국

주문리는 거문리, 방꼴, 오릿나루, 약물골, 용소동, 소돌마을을 모두 포함해 부르는 지명이다. 처음에는 연곡면에 속한 마을이었지만 항구가 생기면서 마을 이름은 ‘새말(신리)’이라 했고, 신리면도 생겨났다. 이후 주문진 이름을 따서 주문진면으로 바뀌었다가 주문진읍으로 승격되었다.

 

겨울 양미리가 반가운 이유

어둠을 가르고 배들이 들어오자, 손수레와 트럭이 부산하다. 종소리와 휘파람 소리가 요란하더니 9시가 넘어서자 시끄럽던 갈매기도 조용하다. 대신에 어민수산시장과 물양장에서 수런거린다. 소매로 팔아야 할 것들을 어민시장으로 옮기고, 물양장에서는 모닥불과 연탄불이 피워졌다. 양미리를 따기 위해 어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몸을 녹이는 중이다. 그물을 걷어와 물양장으로 옮기면 여자들이 모여서 양미리 따는 일을 한다. 양미리는 일시에 대량으로 어획되기 때문에 그물을 통째로 걷어와 물양장에서 따는 후반작업이 많다. 육지와 멀지 않은 연안에 하루 전에 놓았던 그물을 건져온다. 생물이라 바로 따내야 한다. 양이 많을 때는 몇 차례 그물을 건져오기 때문에 쉴 틈이 없다. 대신에 일거리도 생기도 호주머니도 두둑해진다. 보통 아침 9시나 10시에 시작해 저녁 9시 늦으면 10시에 끝난다. 이렇게 버는 일당인 평균 8만원 내외, 잘 따는 사람은 10여만 원 벌이다. 허리 아픈 것도 다리 아픈 것도 부여잡고 참는 이유다.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감각을 잃을 만큼 시린 손이다. 그럴 때는 옆에 화덕에 데워 놓은 뜨거운 물에 장갑을 낀 채 풍덩 담가 보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다. 그래도 양미리가 많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한다. 겨울철에 이만한 일자리가 없다.

수산시장에 걸린 양미리
수산시장에 걸린 양미리

 

주문진의 명물 어민수산시장, 풍물시장

주문진에선 어시장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민이 운영하는 어민수산시장, 주문진수산시장, 주문진종합시장, 주문진건어물시장, 생선구이가게, 횟집센터 등 다양하다. 주문진은 영동고속도로가 계통되면서 동해안을 대표하는 수산시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주문진에 시장이 발달한 것은 부산과 원산을 오가는 화물선에 물자를 공급하는 중개항 역할을 하면서다. 그리고 한류와 난류가 합류되어 좋은 어장이 형성되어 어업전진기지로 발전하면서 활성화됐다. 조선시대 시장은 오일장 형식으로 연곡천과 바다가 만나는 동덕리에 있었다. 지금도 그곳을 구시장이라 부른다.

그 중 어민수산시장은 직접 어장을 하는 선주들이 운영하는 시장이다. 겨울에는 붉은홍게, 도루묵, 양미리, 산오징어, 해삼, 복어, 도치, 가자미, 피문어 등이 가득하다. 남편이 배를 가지고 그물을 보고, 아내는 위판을 하고 남은 활어나 선어 등을 판매한다. 소매로 판매하기 때문에 위판을 한 것보다 이문이 곱절이다. 소비자들도 싱싱한 해산물을 구입할 수 있고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잡아서 팔기 때문에 덤이 통한다. 포장과 택배도 가능해 여행객이 많이 찾는다. 알뜰한 주민들도 새벽시장을 보기 위해 발걸음이 잦은 곳이다. 도로를 건너 주문진수산시장이나 바닷가의 방파제 횟집센터는 활어를 골라 회와 탕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말려 파는 해녀건어물직매장도 있다.

주문진항 경매모습
주문진항 경매모습
양미리와 도루묵과 대구 등 해산물을 판매하는 어민시장
양미리와 도루묵과 대구 등 해산물을 판매하는 어민시장

 

명태에서 물곰, 물곰에서 양미리로?

‘우리 식당에서는 물메기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주문진 수산시장 인근 곰치국 전문집에 커다란 현수막이 걸렸다. 물메기는 통영 등 남해해역에서 많이 잡히는 곰치를 말한다. 통영에서는 미기(물메기)라 부른다. 주문진 등 동해에서 겨울에 많이 잡히는 곰치는 ‘미거지’다. 물메기에 비해 크고 비싸다. 강릉에서는 물곰, 물텀벙이, 물메기, 물미거지, 물고미 등으로 불렸다. 신김치를 넣고 끓이는 곰치국은 아침에 해장국으로 인기가 높다. 비싼 곰치를 대신해 물메기를 사용하는 식당이 있었던 모양이다. 곰치도 예전 같지 않다. 그런데 묵은김치를 넣고 얼큰하고 시원하게 끓인 곰치국이 입소문이 나면서 강릉을 대표하는 겨울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비싸질 수밖에 없다.

주문진항은 고성과 마찬가지로 명태가 주 어종이었다. 이후 오징어 주산지로로 바뀌었다. 지금도 오징어는 봄부터 겨울까지 잡힌다. 문어도 철없이 잡는다. 겨울 주 어종은 도루묵, 양미리, 곰치다. 최근에는 방어와 삼치와 다랑어까지 올라오고 있다. 또 대게와 붉은홍게도 올라온다. 겨울철에 가장 활발한 조업시기이다. 도루묵이나 양미리는 주문진항에서 20~30분 달리면 닿는 바다에서 조업을 하지만 대게, 오징어 등은 한 시간 이상 동쪽으로 나가서 조업을 한다.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청어도 많이 잡힌다. 수온의 변화에 따라 어종도 바뀌고, 서해와 달리 한류와 난류가 교차해 바다는 변화무쌍하다. 어민들의 삶도 바다에 맞춰지고 있다. 국립수산연구소는 동해바다에 67종 어종이 서식하는 것으로 조사했다. 수온과 수심에 따라 다른 어종이 분포한다. 서해의 조차와 달리 동해는 수심과 수온이 어종을 결정한다. 다양한 어종만큼이나 고기잡이에 나서는 선원들의 국적도 다양하다.

 

주문진 등대와 서낭당

등대에서 본 주문진
등대에서 본 주문진
주문진항
주문진항

주문진 최고 뷰포인트는 등대가 있는 곳이다.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북한 땅도 보인다. 주문진의 옛마을 흔적들도 내려다 볼 수 있다. 주문진 등대는 1918년 3월 조선총독부 고시 61호로 강원도에서는 처음 세워졌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봉수가 있었던 곳이다. 해발 30m의 나지막한 언덕이지만 바다로 돌출돼 위기 상황을 전달하기 좋은 곳이다. 1910년대 부산과 원산을 잇는 항로가 개설되고, 중간 기항지로 주문진항이 개발되면서 등대가 더욱 필요했다. 초기에는 석유등으로 홍색과 백색 불빛을 교대로 비췄다고 한다.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후 1951년 스웨덴제 등명기로 복구됐다. 등대건물은 벽돌구조로 기초, 등탑, 등룡으로 이루어져 있다. 벽돌구조는 우리나라 등대의 초기건축에 해당하는 것이다. 입구는 삼각형 박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는 일제의 상징인 벚꽃이 조각돼 있다. 외벽은 한국전쟁 당시 총탄 흔적이 남아 있는 역사의 증인이다. 등대마을은 한 때 주문진의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주문진의 달동네로 꼽힌다. 겨우 사람이 비켜설 수 있을만큼 좁은 골목도 있다. 그때는 좁은 골목과 언덕에 명태를 말리는 덕장이 즐비했다.

강릉지역 서낭신앙은 농촌과 어촌에서 모두 나타난다. 어촌에서는 용왕제, 풍어제, 해신제라고도 한다. 해신을 용이나 여신으로 모셨다. 집안의 행운, 어업의 풍어, 무병, 아들 등을 기원했다. 주문리에는 주문리 1리, 서낭당마을, 거문동에 각각 수호신인 서낭을 모시고 있다.

주문1리 서낭당 제단에는 용왕신, 우복 정경세 내외, 진이와 그녀가 나은 아이 화상이 그려져 있고, 성황지신, 토지지신, 여역지신을 모신다. 제사는 조선 광해군 6년(1614년) 강릉부사 정경세가 사당을 지어 지내면서 시작됐다. 건물 기둥에 커다란 용이 그려져 있으며, 제당 벽에 문어, 소라, 성게 등 해초를 그린 벽화가 있다. 제일은 음력 3월과 9월이다. 서낭제를 지내고 사흘에 걸쳐 별신굿을 지내기도 한다.

선주들이 진이서낭에 제를 지내며 풍어를 기원한다.
선주들이 진이서낭에 제를 지내며 풍어를 기원한다.

진이서낭에 전해오는 이야기이다. 고려시대 나루터에 어부의 딸 진이가 살고 있었다. 연곡현감이 순시를 돌다가 봄날 바닷가에서 해초를 뜯는 진이를 발견했다. 진이의 아름다움에 반해 수청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현감이 진이 아비를 불러 압력을 가했지만 끝내 거절하자 방에 가뒀다. 사흘 뒤에 확인하니 진이가 죽어 있었다. 옆에는 진이가 낳은 사내아이도 있었다. 진이가 죽은 후 주문리에는 풍파와 해난 사고가 잦았다. 아낙들이 진이 영혼을 달래기 위해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 광해군5년 강릉부사가 주문진 바닷가를 지나다 포구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내력을 물으니 자초지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사연에 감동한 부사가 서낭당을 짓고 명복을 빈 후에는 풍파도 해난사고도 없었다고 한다. 서낭당 아래에는 진이 위패를 돌에 새겨 따로 모셔두었다.

주문진등대
주문진등대

어업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에는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 제물로 사용했다. 지금은 제물로 필요한 소머리와 고기를 사서 올린다. 규모도 축소했다. 어획량 감소도 이유지만 종교의 영향도 크다. 풍어제나 당산제를 지내는 어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제의도 어촌계를 중심으로 간단하게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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