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_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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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송우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1.01.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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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인물을 인문정신으로 재구성하다

[현대해양] 향파는 청소년을 위한 작품을 창작할 때, 역사적 인물을 많이 활용했다. 현대를 살아갈 학생들에게 바람직한 인간상을 전해주고자 함이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학생》이란 잡지에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만든 소년소설을 자주 발표한 이유이기도 하다. 《학생》 지에 실린 「주막집」도 그러한 모습을 내보이는 작품 중의 하나다.

이 작품은 그 구성부터 조금은 색다르다. 이야기의 출발은 보통 이야기의 주체가 되는, 소위 주인공을 독자에게 먼저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그러나 「주막집」은 비를 맞으며 가마를 메고 가는 교군들의 힘든 모습을 먼저 보여줄 뿐 가마 속 주인공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가마 속의 주인공은 조선시대 유명한 송시열이란 인물인데, 그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놓지 않고 있다, 쏟아지는 비 속에서 비를 맞으며, 송시열을 가마에 태워가고 있는 교군들의 형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는 이 작품의 주인공을 마지막 부분까지 숨겨두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즉 독자들에게 가마 속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라는 의구심을 가지게 함으로써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는 일종의 추리기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계속되는 비를 맞으며 교군들이 드디어 도착한 곳은 어느 외딴 주막집이다. 이들은 어느 시골 조그마한 초가집 주막에 비를 피하러 들어간 것이다. 주막집에 들어서서도, 가마 안에 타고 있던 인물은 구체적으로 소개되지 않는다. 그저 “키가 팔 척이나 될 만큼 큰 남자 한 사람이 나왔다”라고만 묘사하면서 그의 외양만 상세하게 전해주고 있다. 즉 “어깨가 쩍 벌어지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두 눈이 무섭게 위로 쭉 찢어져 올라간 사람이고, 흰 모시 창옷에다가 가는 띠를 느직히 매고 큰 갓을 쓰고 있는 것만 보아서는 무얼하는 사람인 것도 모르며, 어찌보면 농사 감독이나 하고 들어앉아 있는 고집 센 시골뜨기같이 보인다”고 형상화함으로써 더욱 인물에 대한 긍금증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이렇게 주막에 도착해, 가마에서 내린 그는 하나밖에 없는 주막집 방에 들어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또 한 사람이 주막에 들어선다. 말을 타고 온 한 무관이다. 그는 주인에게 방이 있느냐고 묻는다. 방이 하나밖에 없어 먼저 온 손님과 함께 방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니, 이 무관은 그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어 방에 들어선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술을 청하고 주막집에는 없는 안주를 요청하는 등 허세를 부린다. 그리고는 먼저 온 손님에게 술을 한 잔 같이 하자고 권한다. 먹을 만큼 먹었다는 대답에 그 무관은 혼자 한 통 술을 다 비워낸다. 술을 마시고 난 뒤에 담배를 한 대 피우고는 먼저 온 손님에게 말을 걸며, 장기 한 판 두기를 청한다. 먼저 온 손님이 “잘 두지를 못한다”는 말에 “꼭 잘 두어야만 하나? 심심한데 한 판 두어 보자구?”라고 응수한다. 그리고는 “자, 맞둘 텐가 차나 포를 떼고서 둘 텐가? 라고 으스댄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오만무례한 말버릇이다. 그래도 먼저 온 손님은 기분 나쁘단 내색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두어보죠”라고 응수한다. 그래서 시작된 장기는 내리 세 판이나 먼저 온 손님이 이기고 만다.

장기 세 판을 두면서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무관은 먼저 온 손님에게 다시 질문을 한다. “그런데 보아하니 농사 백성은 아닌 것 같은데”라고 말을 흐리니, 먼저 온 손님은 “뭐 같이 보이오?”라고 묻는다. 무관은 “글쎄, 풍채를 보니, 보리동지(보릿 되나 주고 산 벼슬)라도 하긴 한 모양이야!”라고 말한다. 이렇게 무례한 말을 했는데도 역시 먼저 온 손님은 조금도 언짢아하는 빛을 내보이지 않고는 “대단한 벼슬도 못 됩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무관은 “성명이 뭐지?”라고 다시 묻는다. 이 때 먼저 온 손님은 “송시열이라고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는 무관이 별안간 얼굴이 새파래지면서, “뭐라고 했어?”라고 놀란 기색을 보인다. 그러자 먼저 온 손님은 다시 “송시열이라고 했습니다. 송나라 송(宋)자, 때 시(時)자, 매울 열(㤠)입니다”라고 다시 답한다. 이 말을 듣고는 무관은 얼굴빛이 벌개지더니 송시열의 뺨따귀를 한 대 올려붙이고는 다음과 같이 호통을 쳤다.

“이 고얀 놈 같으니라구! 어째서 네 놈이 감히 송시열 대감의 이름을 함부로 쓰고 돌아다니는 거냐? 송시열 대감으로 말한다면 지위가 정승의 자리에 계시고 학문과 도덕이 천하에 높으신 어른인데, 네까짓 시골 무지렁이가 송시열 대감의 이름을 쓴다?”라고 해대고는 말을 타고 나는 듯이 달아나 버렸다. 무관이 비를 맞으며 달아나는 것을 본 송시열 대감은 크게 소리를 내어 그 자리에서 웃었다.

이로써 가마 속에 감추어져 있던 인물은 보통 사람이 아닌, 그 당시 정승이었고 당파 정쟁 속에서 노론의 우두머리로 학문으로 보나 뭘로 보나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인 송시열임이 밝혀진다. 이런 사람에게 무관이 반말을 무례하게 쓰고 놀려주기까지 했으니 주막집 주인 역시 파랗게 질린 얼굴로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주막 주인에게 송시열이 무관의 정체를 물었다. 주막 주인은 그가 안주 병사라고 말해준다. 그가 나중에 송시열에 의해 더 높은 병사로 자리를 옮겼다는 얘기로 이 작품은 갈무리된다. 송시열은 그 무관이 송시열에게 보였던 무례한 행동만 생각한 게 아니었다. 무관이 지닌 또 다른 긍정적인 일면을 높이 샀던 것이다.

우리는 이 얘기를 통해 송시열의 인품이 풍기는 인문정신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무관이 송시열에게 해대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듯한 행위들을 엿보면서 희극적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향파 선생의 소년소설이 지닌 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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