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㉜ 홍어값 좋을 때 인심도 좋았다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㉜ 홍어값 좋을 때 인심도 좋았다
  • 김준 박사
  • 승인 2020.10.13 18: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천 옹진군 대청도
모래울마을(사탄동)의 일몰
모래울마을(사탄동)의 일몰

[현대해양] 소청도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대청도로 가는 배에 올랐다. 옥죽동 홍어잡이 어민을 만날 계획이다. 홍어라면 많은 사람들은 흑산홍어를 생각할 것이다. 심지어 홍어는 흑산도에서만 잡히는 것으로 오해한다. 흑산홍어 마케팅의 성과라 할 수 있지만 대청도 주민들은 불편하다. 이들도 일찍부터 홍어회를 즐겨 먹었고, 홍어를 잡아 생계를 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흑산도 홍어잡이 어법인 ‘걸낙’은 대청사람들이 보급했기 때문이다.

대청도라는 지명은 푸른 섬을 의미하는 ‘포을도’에서 비롯되어 ‘청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서경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대청서(大靑嶼)’라 소개했다. 멀리서 보면 숲이 검게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방치된 땅이었으나 세종대에 백령도는 입거를 대청에는 목우장을 세웠다. 18세기 후반이 되어 중국의 황당선의 출몰이 잦아지자 해방(海防) 강화를 위해 주목을 하기 시작해 진을 설치하고 진장을 두었다. 을미개혁 이후에는 도장이 섬을 다스렸다. 대청면은 대청도와 소청도 두 개의 유인도와 대갑죽도와 소갑죽도의 무인도가 있다.

대청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대청면에 있는 섬이다. 쾌속선으로 3시간 반을 달려야 닿는다. 섬 동쪽과 남쪽은 급경사로 해식애·시스텍·해식동굴이 발달하고, 북쪽과 서쪽은 사구와 모래해변이 발달했다.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곳은 옥죽동 모래사막과 농여해변, 모래울 등 사구와 해변이며, 서풍받이, 조각바위, 독바위 등 국가지질공원 지질명소들이다. 특히 옥죽동사구는 그 길이 1.6㎞, 폭이 600m로 축구장 70개 규모이다. 또 모래울마을(사탄동)은 길이 700m 폭 200m 높이 20m의 해안사구가 형성되어 있다. 그 해안사구 해송과 함께 펼쳐진 노을의 해안경관이 으뜸이다. 주요 어항은 선진포, 옥죽포, 사탄동에 있으며, 여객선이 입출항하는 곳은 선진포항으로 국가어항이다.

조각바위 위에서 본 대청도
조각바위 위에서 본 대청도

 

조기와 고래는 떠났지만

대청해역은 백령해역, 연평해역과 함께 우리나라 서해 북단 해안으로 북한과 마주한 접경해역이다. 다도해와 리아스식 해안 그리고 갯벌이 발달해 칠산바다와 함께 서해를 대표하는 어장이다. 주요 어종은 까나리와 홍어, 우럭, 농어, 놀래미, 광어 등 어류와 꽃게와 새우 등이다. 이중 많이 잡히는 어류는 조피볼락과 참홍어다. 소득으로는 참홍어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어촌계는 2019년 기준으로 선진어촌계(150명), 옥죽어촌계(86명), 소청어촌계(87명)이다. 이중 옥죽어촌계는 홍어잡이가 중심이다.

대청도는 모래해변, 모래언덕, 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물을 가두기도 어렵고, 농사를 지을 땅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았다. 쌀을 얻기 어려워 목포나 영산포에 홍어를 팔아 쌀을 팔고 생필품을 구했다. 홍어잡이를 하지 못하는 주민들은 홍합을 채취해 백령도에 가지고 가서 쌀을 구했다. 이렇게 백령도로 홍합을 가지고 가서 파는 것을 ‘홍합장사’라 했다. 백령도는 논이 많아 쌀을 팔아 생활하는 섬이었다.

1930년대 한 신문에서는 ‘동편 일대의 주요 식용 수산물은 명태와 정어리, 서편 일대는 조기와 홍어’라고 했다. 동편은 동해를 서편은 서해를 말한다. 일제강점기 흑산도, 칠산도, 어청도, 연평도, 대청도를 아우르는 수산물은 조기와 홍어였다.

대청도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고래잡이 전진기지였다. 일본의 포경회사인 ‘동경포경회사’는 1915년 대청도에 고래잡이 사업장을 만들었다. 초기에 고래의 회유하는 울산, 장전, 신포, 대흑산도, 거제 등에 사업장을 설치하고 고래를 잡았다. 1915년 대청도에서 시작해 1926년에는 제주도까지 확대했다. 대청도에서는 1945년에 걸쳐 봄부터 초여름까지 고래를 잡았다. 1930년대 매년 3척에서 6척의 배가 많을 때는 60여 마리까지 잡혔으나 나중에는 점차 쇠퇴하였다. 대청도 연해에서 잡는 고래는 참고래가 많이 잡혔으며, 대왕고래와 돌고래도 잡혔다. 1930년대 중반 일본포경주식회사는 흑산도로 주력기지를 옮겼다. 고래가 서해로 북상하는 겨울이면 선진항은 100여 명이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붐볐다. 선원과 상인을 따라 일본 게이샤들도 들어올 정도였다.

백령대청국가지질공원 지질명소 농여해안 나이테바위
백령대청국가지질공원 지질명소 농여해안 나이테바위

 

홍어를 팔아 쌀을 구하다

사람들은 홍어라고 하면 흑산도를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흑산도 못지않게 홍어를 많이 잡는 섬이 있다. 흑산도처럼 삭힌홍어가 아니라 싱싱한 홍어회를 즐겨 먹는다. 서해5도 중 하나인 대청도가 그곳이다. 대청도 선진포 한 식당에서 맛본 홍어회는 분명 흑산도 예리항에서 만난 참홍어였다.

참홍어는 수온이 낮은 수심 100m 내외에서 서식하는 냉수성 어종이다. 여름에는 대청, 소청, 백령 등 장산곶 주변의 바다에 서식하다 겨울에는 흑산도로 내려간다. 참홍어가 남쪽으로 가면 대청도 어민들도 따라갔다. 1970년대 대청도, 소청도, 백령도 등에서 홍어를 잡기 위해 흑산도로 내려간 사람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지금도 흑산도에 머물며 홍어를 잡는 사람도 있다. 홍어잡이를 나갈 때는 돼지머리, 팥시루떡 외에 홍어나 우럭을 올리며 출어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때 대청도의 미끼 없이 홍어를 잡는 ‘건주낙’ 어법이 흑산도에 전해졌을 것이다. 흑산도에서 ‘걸낙’이라 부른다. 긴 몸줄에 미늘이 없는 바늘을 한 뼘도 되지 않는 짧은 줄에 매달아 홍어가 다니는 길목에 놓아 걸리도록 해서 잡는다. 봄에 잡힌 홍어는 차곡차곡 저장 해서 세 척의 운반선을 이용해 교대로 영산포나 목포에 내다 팔았다. 대청도에서 출발한 배가 사나흘 걸려 영산포에 도착하면 자연숙성이 되었다. 이렇게 숙성된 홍어를 전라도에서 잘 먹어주었고 가격도 좋았다. 운반선은 돌아올 때 어민들로부터 주문을 받아 쌀 등 식량과 생필품을 가져왔다. 또 여름부터 가을까지 잡아 말린 ‘건작홍어’는 시제가 많은 경상도에서 인기가 좋았다. 여름 홍어는 소금에 절였다가 지금은 북한에 속하는 장연, 태탄, 신천, 송화에 팔아 식량과 생필품으로 교환했다. 홍어를 판 운반선이 어민들의 주문을 받아 쌀을 비롯한 생필품을 사다 주었다. 땔나무가 귀할 때는 홍어를 팔아 나무를 구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을 직후 홍어잡이는 호황을 누렸다. 홍어 네 마리를 팔면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홍어값이 좋을 때 인심도 좋았다.

대청도 홍어말리기(옹진군청 제공)
대청도 홍어말리기(옹진군청 제공)

지속가능한 섬살이는!

요즘 대청도 옥죽동은 홍어잡이 채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이 마을은 홍어만 잡는 배가 7척이 있다. 흑산도로 출어할 때만 해도 대청도의 선진포나 사탄동 등 다른 마을까지 모두 80여 척의 홍어잡이 배가 있었다. 최근에는 울릉도와 독도에서 많이 잡히는 참가오리도 국립수산과학원의 유전자분석 결과 참홍어로 밝혀졌다. 결국 참홍어는 흑산도, 대청도 그리고 울릉도와 독도까지 우리 바다 끝섬 깊은 바다를 지키는 바닷물고기이다.

2018년 대청면에서 생산되는 수산물의 21.1%가 홍어다. 대청면의 어획량을 보면 홍어, 조피볼락, 쥐노래미 순이다. 홍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옹진군의 자료를 보면 대청면의 홍어 어획량은 75,570㎏이다. 1890년(고종27년)의 기록을 보면 대청도에서 잡은 홍어와 가오리를 상납하고 중국상인과 밀매를 했던 것 같다. 어미들이 잡은 홍어를 뺏아가는 해적들도 출몰했다. 분단 이후에는 홍어를 잡는 배가 납북되기도 했다.

홍어잡이 걸낙을 정리하고 있는 옥죽동 어민들
홍어잡이 걸낙을 정리하고 있는 옥죽동 어민들

한 번에 수천 수만 개의 알을 낳는 일반 어류와 달리 참홍어는 알집인 난각에 겨우 4-5개의 알을 낳는다. 이렇게 재생산력이 낮고, 남획과 서식지 훼손 등으로 몇천 톤씩 잡히던 참홍어는 최근 몇백 톤으로 감소했다. 참홍어는 2008년부터 총허용어획량의 대상종이 되어, 우리나라에서도 흑산도나 대청도 인근 바다에서는 매년 허용된 양만 어획을 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총허용어획량에 적용을 받지 않아서 오히려 남획우려를 낳고 있다.

대청도는 뭍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접경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빈집이 생각보다 적다. 왜 그럴까. 우선은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어장이 유지되고 있다. 다음은 ‘서해5도지원특별법’에 의해 다양한 지원사업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향후 섬정책에서 고려해야 할 요소이기도 하다. 바다가 살아야 하고, 의료·교통·주택·교육 등 주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지원이 민자유치를 통한 개발계획보다 현실성이 있다.

옥죽동 모래언덕에서 본 옥죽동포구. 희미하게 백령도가 보인다
옥죽동 모래언덕에서 본 옥죽동포구. 희미하게 백령도가 보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