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㉚ 서해 최북단 포구 백령도 두무진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㉚ 서해 최북단 포구 백령도 두무진
  • 현대해양 기자
  • 승인 2020.08.12 08: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대해양] 백령도는 한국전쟁 전에는 황해도 장연군에 속했던 섬이다. 두무진이 있는 연화리 심청각에 올라 보면 북한의 장산곶에 손에 잡힐 듯 가깝다. 포구에서 만난 주민은 통통배로 30분이면 뭍으로 갈 수 있는 고향을 두고 쾌속선으로 4시간을 달려야 한다고 했다. 이 곳에는 타향을 고향 삼아 오가는 실향민이 많다. 백령도는 서해의 최북단에 있는 섬이다. 울릉도나 흑산도가 그렇듯 안개와 파도로 뱃길이 자주 끊겨 오가는 것이 불편한 섬이다. 당일 오가는 것이 어렵고 뱃삯도 비싸 쉽게 오갈 수 없다.

 

10억 년의 기록, 두무진

이곳에는 여객선이 닿는 용기포를 비롯해 오군포, 장촌포, 중화동포포구, 두무진포구, 사항포, 고봉포 등의 포구가 있다. 마을은 대부분 포구 주변에 있다. 이중 두무진은 가장 북쪽에는 있는 포구이자 섬마을이다. 지금처럼 제방을 쌓아 포구를 만들기 전에는 백령도 최적의 자연 포구였다. 해방 전에는 백령도만 아니라 대청도와 소청도 홍어잡이 배들이 두무진에 모여들었다. 이곳에서 겨울과 봄에 잡은 생홍어와 5월이 넘어서 소금에 절인 간홍어를 황해도 진남포, 장산곶, 안악 지역으로 가져가 식량과 바꾸었다. 두무진은 지금도 백령도에서 회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포구이다.

거친 파도에 뿌리를 박고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바위들의 모습이 머리카락을 닮았다 해서 두모진이라 부르다 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는 형상이라 두무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곳은 약 4㎞에 이르는 해안선을 따라 높이 100m 내외의 바위와 절벽이 서해의 해금강이라 불릴 만큼 아름답다. 특히 장군바위, 신선대, 선대바위, 형제바위, 코끼리 바위 등이 절경을 이룬다. 운이 좋은 날은 자연이 빗은 작품 위에서 휴식 중인 점박이물범을 만날 수도 있다. 명승으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10억년 전 퇴적된 사암이 지각변동으로 땅속에서 고열과 고압을 받아 변성된 암석이다. 이 암석이 오랜 시간 바람과 파도와 비에 의해 침식과 풍화작용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두무진의 해식지형이다. 명승 두무진만 아니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콩돌해변, 진촌리 현무암(감람암 포획 현무암), 물범바위, 사곶해변, 용틀임바위와 남포리습곡 등이 있다. 한 섬에 이렇게 많은 천연기념물이 있는 곳이 있을까. 조선조에 백령도로 유배를 온 이대기(1551-1628)는 이러한 경관을 보고 <백령도지>에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 극찬을 했다. 한반도에서 잘 관찰되지 않는 신원생대의 암석들은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명승으로 지정된 두무진
명승으로 지정된 두무진

 

백령도 주민들 어떻게 살았을까

백령도 장촌 까나리
백령도 장촌 까나리

한국전쟁 전까지는 그러저럭 ‘먹고 남는 백령’이라 했다. 하지만 전쟁 후 실향민들이 들어오면서 식량의 절대량이 부족했다. 쌀은 고사하고 옥수수죽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간척사업을 마무리할 때 식량이 고갈되어 방조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 천주교구조회의 구호양곡으로 끼니를 이었다. 백령도는 천주교와 인연이 깊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 키슬라프 목사나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가 두무진을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지금은 인천에서 가까운 용기포가 나들목이지만 과거에는 뭍과 가까운 뱃길은 두무진이었을 것이다. 섬으로 드나드는 나들목이라 ‘두문진’이라도 불렀다. 섬마을 곳곳에 천주교 공소가 있는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이다.

당시 <경향신문>(1960.7.21.)이 전하는 내용이다. ‘농사지을 땅이 없어 까나리와 홍어잡이로 겨우 연명’을 하고 있으며, 연평도 등 인근 어장에 ‘조기가 들어왔지만 다른 지방에서 온 어선들이 잡아가는 형편’이다. 조기어장이 형성되었지만 정작 주민들은 조기잡이에 나설 배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선을 짓는 비용과 농사지을 땅을 마련하기 위한 간석지공사비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며, ‘낙도를 버리지 말 것’을 간청하는 기사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1991년 백령도간척사업이 시작되었다. 일찍 완공된 북포공구 40여만 평은 논으로 조성해 주민들이 불하받았지만, 솔개지구 40만 평은 완공 후 논으로 이용하지 못하고 방치되다 최근 꽃씨를 뿌려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담수호로 계획한 백령호도 염도로 농사에 사용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백령도 최고의 자원인 내만갯벌과 사곶해변까지 훼손하며 간척을 하였지만 무용지물이 될 위기에 놓여 있다.

 

물범과 어민의 공생

백령도에는 50여 척의 배가 까나리를 잡는다. 이 중 두무진이 15~16척으로 가장 많고 다음은 용기포 11척이며 화동포구를 제외하고는 모든 마을에서 몇 척씩 까나리를 잡는 배가 있다. 봄 어기가 끝나면 까나리를 잡고, 가을에는 꽃게와 멸치를 잡았다. 이젠 까나리가 백령도를 대표하는 물고기가 되었다.

물범바위에 휴식중인 점박이물범
물범바위에 휴식중인 점박이물범

백령도에서 까나리를 잡는 방법은 안강망과 낭장망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백령도에서는 이 중 낭장망을 많이 이용한다. 지금처럼 쇠로 만든 닻을 쓰기 전에는 돌을 둥글게 짠 망태에 담아 배를 고정시켰다. 이를 ‘고’라 불렀다. 배에 그물을 매달고 바다에 넣는 것을 ‘고 묻는다’고 했다. 배 좌우현에 자루그물을 달아 까나리, 새우, 조기 등을 잡았다. 강화, 석모, 외 등에서는 곳배라 했다. 영광, 신안, 진도에서는 고 대신에 큰 나무 닻을 사용해 닻배(멍텅구리배)라 불렀다. 모두 해선망에 속하는 어법이다. 곳배는 사공(선장), 갯사공, 동사 두 명 등 모두 네 명이 일을 했다. 배를 타는 사람만 아니라 해변에서 까나리를 삶고 사공을 위해 밥도 짓고 사람까지 포함하면 모두 다섯 명이 까나리잡이에 참여했다.

포구에 있는 까나리를 잡는 그물을 살펴보면 군데군데 찢어져 있다. 바닷속에서 돌이나 장애물에 걸려 찢어진 것이 아니라 물범이 그물에 든 까나리를 먹기 위해서 찢은 것이다. 10여년 전만 해도 주민들은 물범을 적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총으로 쏠 수 있다면 죽이고 싶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지금은 어민들이 물범쉼터를 마련하고 공생하며 백령도를 살리는 방안을 이야기할 정도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백령도에 ‘점박이물범시민사업단’ 사무소를 마련했다. 그 전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물범동아리’가 만들어져 활동 중이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어른들도 ‘점박이물범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었다. 이러한 변화는 인천녹색연합이 10여년 동안 추진한 점박이물범의 모니터링과 주민사업을 진행해온 결과다.

백령중고등학생으로 이루어진 물범동아리 장촌까나리잡이(옹진군제공)
백령중고등학생으로 이루어진 물범동아리 장촌까나리잡이(옹진군제공)

 

세월과 삶이 어우러져야

백령도에는 천연비행장으로 알려진 사곶해변이 있다. 갯메꽃이 아름답고, 모래밭에 콩게들의 숨바꼭질도 정겹다. 마을과 해변 사이에는 울창한 해송숲이 있다. 얼른 봐도 자연천이로 만들어진 숲이 아니다. 이곳에 해송을 심기 시작한 것은 1965년이다. 사곶초등학교 교장을 부임한 김상희 교장선생님은 낙도국민학교를 자활학교로 가꾸기 위해 해풍을 막고 학교수입도 올릴 수 있는 해송을 사곶의 모래언덕에 심기로 결정했다. 1964년 가을부터 시작해 어린이들과 함께 종자를 모으고 10ha의 학교림을 조성했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까지 수만 그루의 해송을 심고 팔아 낙도를 자활학교로 만들었다. 그 사이 어린묘목이 자라면서 해풍과 모래바람을 막아 주민들의 생활을 도왔다. 지금은 백령도의 상징으로 남았다. 이렇게 한 지역에 상징이 되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아쉽게 최근 단단한 모래해변이 푹푹 빠지는 모래갯벌로 바뀌고 있다. 간척지와 담수호 조성을 위해 축조한 방조제가 원인이라는 지적이 있다.

 

백령도 맛을 느끼려면

백령도에는 여섯 개의 냉면집이 있다. 냉면은 메밀로, 육수는 사골을 기본으로 하는 황해도식이다. 남북 분단 이전에 백령도는 황해도에 속했다. 국수틀도 하나 놓고 솜씨 좋은 집에서 냉면을 내려 삶의 허기와 고향 생각을 달래는 음식이었다. 며칠 머물다 전쟁이 끝나면 돌아갈 심산으로 고향에서 가까운 백령도에 머물렀다. 그 며칠이 70여 년의 세월로 바뀌었다. 봄이면 농사가 시작되고 어장을 해서 먹고사느라 외로움과 서러움을 잊었다. 하지만 일이 없는 겨울철이면 고향 마을이 보이는 장산곶 하늬바다에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스멀스멀 그리움과 외로움이 피어올랐다. 이 무렵 찾았던 것이 냉면이었다. 백령도의 특산물인 까나리 액젓이 곁들여지면서 ‘백령냉면’이라는 이름도 붙었다. 백령냉면은 이제 주민들보다 여행객들이 더 잘 알고 많이 찾는다.

 

백령냉면
백령냉면

또 찹쌀이나 멥쌀로 인절미를 만들어 갯콩, 녹두, 계피 등을 고물로 씌운 떡을 만들어 먹었다. 지금은 갯콩인절미가 제철이다. 설탕을 넣지 않는다. 짠지떡은 또 어떤가. 만두 같은데 떡이라 한다. 굴과 적당히 익은 김치를 찹쌀과 밀가루로 만든 얇은 피에 싸서 만든다. 메밀수제비, 메일칼국수, 메일빈대떡 등도 있다. 이런 백령도의 맛을 경험하려면 섬마을로 찾아가야 하고 기다려야 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이들 음식의 기본 간은 까나리 액젓이다. 함께 나오는 김치나 깍두기나 장아찌 등도 까나리 액젓은 기본이다.

백령도 여행은 힘들다. 몇 시간 동안 배에 갇혀 오는 것도 쉽지 않다. 또 도착해 단체로 몰려다니며 정해진 코스를 따라 냉면 한 그릇 먹고, 사곶해변을 지나 심청각, 두무진, 콩돌해변 순으로 수박 겉핥기로 돌아보고 나간다. 백령도의 진짜 맛과 멋은 머물러야 느낄 수 있다. 느리게 조용하게 자세히 살펴야 보인다.

천연기념물 콩돌해변
천연기념물 콩돌해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