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_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25
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_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25
  • 남송우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승인 2020.07.07 09: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향파 선생의 등단작품 「배암새끼의 무도」가 지니는 의미
신소년 1923년에 창간되었던 아동잡지. 1923년 10월부터 1934년 5월까지 발행되었다. 방정환이 색동회를 조직하여 아동문화운동을 전개한 데 자극을 받아 나오게 되었다.
신소년 1923년에 창간되었던 아동잡지.
1923년 10월부터 1934년 5월까지 발행되었다.
방정환이 색동회를 조직하여 아동문화운동을
전개한 데 자극을 받아 나오게 되었다.

[현대해양] 작가에게 있어, 등단작품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의미를 갖는다. 작가로서의 출발을 알리는 공식적인 선언임과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작품세계의 예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향파 선생이 첫 등단 작품을 발표한 매체는 《신소년(新少年)》이다. 1928년 5월에 나온 이 잡지에 향파 선생은 「배암새끼의 무도」를 발표했다. 등단작품의 성격도 중요하지만, 그 작품이 발표된 매체 역시 중요하다. 매체의 성격은 수록되는 작품들의 경향과 내용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신소년(新少年)》은 1923년 10월, 《어린이》보다 7개월 뒤에 창간되어 1934년 5월(?)까지 11년간이나 발행된 장수한 소년잡지이다. 1923년 12월 3일자로 발행된 제3호의 판권장을 보면, 편집인 김갑제(金甲濟), 발행인 다니구찌(谷口貞次郞, 이문당 대표), 인쇄자 노기정(魯基禎), 인쇄소 한성도서, 발행소 신소년사, 총발매소 이문당(以文堂, 서울·관훈동 130), A5판 50면, 정가 15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소년사」 주소가 ‘이문당’과 같은 것으로 보아 잡지는 이문당에서 나왔는데, 발행인 ‘다니구찌’가 이문당 대표로 기재된 데에는 의문점이 남아있다. 왜냐하면 이문당의 설립자는 당대의 재력가인 이석구(李錫九 1880~1956)인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으나 지금 그때의 사정을 아는 사람은 없다. 이문당은 일제 말기에 자진 폐업했다고 전한다. 지금 성균관대학교 캠퍼스 한 자리에는 많은 재산을 기부한 그를 기리는 〈학봉(學峯) 이석구선생기념비(李錫九先生紀念碑)〉가 서 있다. 그의 아들이 소설가요, 국문학자로 숙명여대 총장서리를 지낸 이능우(李能雨)이다. 윤고종(尹鼓鍾 1914~?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이 쓴 『아동잡지소사(小史)』(《아동문학》배영사, 1962)에서는 최남선의 《소년》을 비롯하여, 1920년대에 나온 《어린이》·《신소년》·《새벗》·《별나라》 등을 주로 다루었는데, 그중 《신소년》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신소년》은······ 첫인상으로 볼 때, 그 당시 일본에서 나오고 있던 강담사(講談社)의 《소년구락부(俱樂部)》나 실업지일본(實業之日本)사에서 나오던 《일본소년》과 비슷한 편집체제를 가진 잡지였다. 편집체제가 일본의 그것을 연상케 할 뿐이고, 내용은 어디까지나 독특한 것이었다. 일본의 소년잡지들이 그들의 충군애국(忠君愛國) 관념을 고취하고, 강조한 것과는 반대로, 우리의 민족사상을 교묘하게 고취하는 가지가지의 기사를 빈틈없이 싣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총독부 당국의 눈을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고심이 엿보이는 기사들이었다. 그 한 예를 1926년의 《신소년》 정월호에 실린 소화(小話) 한 토막에서 엿볼 수 있었다. ‘······개성(開城)의 옛이름은 송도(松都)인데 송도의 어린이들은 한 가지 자랑을 가지고 있다. 물건을 살 때에는 절대로 외국 사람 가게에서 사지 않는 일이다. 같은 값이 아닌 비싼 값으로도 우리나라 사람 가게에서 사야 속이 후련하다······’는 줄거리인데, 개성사람들은 일본인 가게에서는 물건을 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반일(反日)에 결부시킨 것이다.”

《신소년》 창간사는 ‘민족’이다 ‘독립’이다 하는 말 대신에, ‘장래 조선의 주인이 되어 조선을 다스려 갈 300만 소년’이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 조선은 3백만 소년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충심으로써 여러분 소년을 사랑하며 또 존경하나이다. 장래 조선의 주인이 될 사람도 여러분 소년이요, 이 조선을 맡아서 다스려갈 사람도 여러분 소년이올시다. 우리 조선이 꽃답고 향기로운 조선이 되기도 여러분 소년에게 달렸고 ······.”

창간 초기의 편집주간은 신명균(申明均 1889~1941)이 맡았고, 이어 김갑제·이주홍(李周洪 1906~1987) 등이 맡았다. 어린이들에게 미래의 조국을 기대하며, 민족주의의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창간한 이 잡지의 편집주간까지 맡았던 향파 선생은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어린이들에게 심어주고자 했을까?

이야기의 주체는 어미 뱀과 새끼 뱀 세 마리이다. 어미 뱀은 매일 먹이를 잡으러 나가는데, 하루는 늦게 돌아왔다. 그 때 제일 큰 새끼뱀이 엄마가 잡아먹는 개구리를 자기들도 먹고 싶어한다.

다음 날 엄마가 나가고 난 뒤에 이 새끼 뱀들은 큰 형의 꼬임에 속아 맛있다는 개구리를 잡으려 밖으로 나가게 된다. 개구리를 발견한 이 새끼 뱀들이 그 개구리를 잡으려 하지만 개구리는 도망치고 대신 제일 작은 뱀 새끼가 까치에 물려가고 말았다. 동생을 잃은 뱀새끼들은 슬퍼기도 하고. 엄마의 꾸중이 걱정이 되어 엄마가 돌아오자 거짓말을 했다. “막내 새끼 뱀은 아침에 개구리가 먹고 싶다고 해서 나갔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엄마는 슬프지만 다른 짐승에게 잡아먹혔다고 단념을 하고는, 남은 새끼 뱀들에게는 다시 한번 밖에는 나가지 말라고 당부를 한다. 그리고는 다음 날은 염려가 되어 광에 있는 개구리 한 마리를 갖다주면서, 너희들은 이것을 아직은 먹을 수가 없으니, 가지고 놀기만 하라고 부탁을 하고 집을 나갔다.

집에 남은 두 형제 뱀새끼는 그 개구리를 문밖에 나가 풀 위에 얹어놓고는 개구리 주위를 빙빙 돌면서 재미나게 춤을 추며 놀았다. 한참 놀다가 다리도 아프고 몸도 피곤해져 잠깐 쉬다가 형제는 내기를 했다. 느름나무 끝까지 먼저 다녀오는 이가 개구리를 독차지하기로 했다. 동생 새끼 뱀은 땀을 흘리며 열심히 기어오르다가 형이 뒤따라 오는지를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형새끼 뱀은 보이지 않고 나무 밑에서 캑캑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형은 혼자 남아서 개구리를 먹다가 목에 걸려서 캑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동생 새끼 뱀은 나무 위에서 형을 보고는 ‘나를 속이고, 엄마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그렇게 돼’라고 중얼거리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다.

향파 선생은 이 작품을 통해,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에게 엄마의 말에 순종하는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다른 사람을 속이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갖는 더 중요한 의미는 향파 선생은 평생 시, 소설, 희곡, 수필, 고전번역 등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지만, 아동문학을 중심에 두고 있었던 이유를 이 첫 등단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향파 선생이 문단에 발을 들여다 놓으면서 시작한 아동문학의 뿌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