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바다 지켜온 선각자들 제7회
쪽빛 바다 지켜온 선각자들 제7회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4.05.09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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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부 재산 털어 조합부채 해결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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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본 연재물 2회차(2013년 11월호)에서 소개한 대로, 연애편지 사건과 지주 후손이라는 이유로 왜경과 인민군에 의해 두 번씩이나 죽음 직전으로 내몰렸던 김병식은 어느 모로 보나 바다와는 인연이 멀었다. 추측컨대, 두 번씩이나 죽음의 문턱을 밟은 그로서는 화려한 학문적 바탕(일본 중앙대 법학과)에도 불구하고 명예나 권세를 쫓는 대신, 차라리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 안정적이면서 여유로운 일상을 영위하는 게 행복이라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었다.

처음 시작한 사업이 양조업(釀造業)이었고, 그것으로 재력을 쌓자 자그만 발동선을 구입하여 시작한 어선어업과 극장 운영 등으로 영역을 확대하면서 단숨에 서해안 소도시인 김제에서 손꼽히는 재력가로 부상했던 사실은 앞서 말한 그대로다.

지금과는 달리 별다른 오락 거리가 없던 당시, 그의 고향 이름을 딴 ‘진봉극장’은 가마니 째 돈이 굴러들어오는 황금 노다지였다. 가령 ‘…하였던 거디었다!’라는 식의 변사(辯士) 해설로 관객의 눈물을 짜낸 무성영화 ‘이수일과 심순애’나 배우며 유행가 가수들을 직접 무대에서 볼 수 있는 버라이어티 쇼 공연이 있을 적이면 천막극장이 미어터질 지경이어서 그 날의 입장료를 가마니 째 을러메고 온 다음 온 가족이 밤새도록 돈을 헤아려야 할 만큼 산더미를 이루곤 했다는 것이다. 더욱 정전이 되거나(당시 전력 사정이 그랬었다) 구닥다리 영사기의 뜨거운 열로 필름이 오그라들면서 스크린이 먹통이 되더라도 일부 건달들이 휘파람을 부는 등으로 잠깐 장내가 웅성거렸을 뿐 화면이 재차 살아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수더분해지던 게 당시의 정서였으므로 극장 운영이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 식 돈벌이의 주종이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김병식은 육법전서를 끼고 사는 엄한 잣대의 법학도라기보다는 차라리 이재를 추구하는 상경계(商經系) 학문 쪽을 전공하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일본 패망 연도(1945년)에 개교한 죽산중·고교 교장까지 겸임하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느니 마소에게 먹일 꼴이나 베는 게 훨씬 낫다는 고집불통의 시골 학부모들을 하나씩 만나서는 배움을 필요성을 역설한 끝에 학생들을 끌어 모아 지방 유수의 명문교로 올려 세운 것도 그의 출중한 지도력을 증거하는 단서의 하나여서 그야말로 손만 대면 모든 게 황금으로 변한다는 그리스 신화 속 ‘마이다스 왕’이 따로 없다는 말에도 항변할 사람 하나 없을 터이다.

그런 그를 세상이 가만 놔둘 것인가. 어느 날 몇 명의 마을사람들이 떼 지어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모두 눈에 익은 어민들이었다.

자리를 권하자 나이 지긋한 노인이 고개부터 먼저 꾸벅 숙였다. 마을 어업조합을 드나들던 오(吳) 영감이었다.
“긴히 논의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머리가 희끗한 영감이 갓 마흔 줄 들어선 김병식더러 ‘어르신’이라 부르며 고개까지 숙이는 데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왜 이러십니까?”
이어진 오 영감의 말은 이랬다.
“부탁입니다만, 의지가지없는 우리들을 제발 살려 주십시오. 이러다가는 우리 모두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요.”

그러면서 김제어협이 처한 상황을 장황히 늘어놓은 다음, 조합을 맡아 시방 손바닥을 말리고 있는 어민들을 이끌어달라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어선어업을 하고 있는 그가 왜 그 사정을 모를까.

“사정은 알겠습니다만, 지금 벌여 놓은 사업을 꾸려나가기에도 워낙 벅차서…….”
그래서 과외의 일을 맡기에는 능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식으로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곁의 청년이 나섰다.
“과외라니요? 어르신도 수산업을 하고 있으니 사정을 잘 알고 있지 않소!”
그렇게 따지고 들기까지 했다.

몇 번의 거절에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거푸 찾아와 떼를 쓰는 데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김병식은 절망감에 허덕이는 어민들이 측은해지면서 자신의 헌신으로 그들에게 한 자락 희망의 끈이나마 잡혀 줄 수 있다면 보다 보람찬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결국 간청을 뿌리치지 못 했다. 1958년 10월의 일로, 그로서는 난생 처음 협동조합 운동에 발을 담그게 된 계기였고, 그리하여 나중 전라북도 서해안을 아우르는 군산어업조합장에 이르기까지 관내 어촌을 부흥과 번영으로 이끌면서 필경 ‘평생을 어민과 함께 보낸 사람’이라는 흔치 않은 별칭으로 숭앙받는 지도자로 거듭나는 순간인 것이었다.

 

<이하 내용은 월간 현대해양 2014년 5월호(통권 529호)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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