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㉖ 호수 같은 바다,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㉖ 호수 같은 바다,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 김준 박사
  • 승인 2020.04.07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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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통영시 욕지면 노대도
하리에서 본 두 섬 사이의 해협
하리에서 본 두 섬 사이의 해협

[현대해양] 몇 차례 그 섬에 가겠다고 나섰지만 번번이 가지 못한 섬이다. 멀리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때론 바람이, 때론 안개가, 때론 시간이 발길을 막아섰다. 노대도까지 배를 타야 하는 시간은 한 시간이 넘는데, 문제는 하루에 딱 두 번 오전과 오후에만 열린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섬이지만 바다생물들에게는 최고의 삶의 터전이다. 노대도는 경남 통영시 욕지면에 속하는 섬으로 상노대도와 하노대도로 이루어져 있다. 상노도대는 상리, 탄항, 산등 세 마을이 자리했고, 하노대도에는 하리마을만 있다. 두 섬 주변에 많은 무인도와 여와 초가 발달해 감성돔, 볼락, 농어, 방어, 문어 등이 많이 서식한다. 낚시객들이 사철 많이 찾는다. 또 수심이 좋고 물이 맑아 스킨스쿠버를 즐기는 사람들도 자주 찾는다. 노대도라는 이름은 낚시를 잘하는 해오라기가 많이 서식해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

노대도를 갈 때는 반드시 ‘삼천포장날(4, 9일)’을 확인해야 한다. 이날은 뱃길이 바뀐다. 오전에는 평소와 같이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하지만 돌아올 때는 두미도를 거쳐 삼천포로 가서 정박을 한다. 그리고 오후에 삼천포에서 두미도와 노대도를 거쳐 통영여객선터미널로 돌아온다. 노대도와 두미도에서 생산된 해산물과 특산품은 통영이 아니라 삼천포 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삼천포에 머무는 동안 주민들은 오일장을 봐서 돌아온다. 옛날부터 노대도 사람들이 삼천포 장을 이용했기 때문에 생겨난 뱃길이다.

 

‘살기 좋은 섬’이었다

선사시대 노대도는 지금과 달랐던 모양이다. 1978년 동아대와 연세대 박물관이 발굴한 조개무지에서 돌칼, 돌도끼 등이 발견되어 진주국립박물관에 소장되었다. 노대도 외에 통영시에 속하는 섬에서 패총이 발견된 곳은 욕지도와 연대도 그리고 노대도이다. 상노대도에서는 상리마을회관 뒤, 산등마을 2곳, 하노대 하리 등 모두 5곳에서 패총이 발견되었다. 선사시대에 살기 좋은 자연환경을 갖춘 곳이었다.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집단을 이루며 살기 시작했다. 패총 덕분에 국사교과서에 노대도가 소개되기도 했다. 고려 말 남해안에 왜구들이 곧잘 출몰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욕지도와 연화도 일대에 왜구의 침입과 전투 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중앙에서 방어가 어려워지자 제주도와 거제도 등 방어하기 쉬운 큰 섬을 제외하고 섬을 비우고 섬사람을 내륙으로 철수시키는 방어책을 추진했다. 이것이 공도정책이다. 노대도에 다시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로 추정한다. <욕지면지>에 따르면 상리마을 입도조는 1894년 경이며, 이어 다른 마을에도 사람들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산을 개간하고 해산물을 채취하며 생활했다.

노대보건진료소 뒤에 지붕이 있는 팔각형 우물이 있고 그 옆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慈善家卓公長律氏施惠碑’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시혜비의 주인공은 탁장률(1908-1995)이다. 탁씨는 하리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오가들이’라 부르는 오늘날 ‘권현망’이라 하는 멸치잡이 배를 탔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그 배를 인수하여 멸치어장을 운영했다. 당시 생활이 어려웠던 노대도 주민들은 대부분 그 배를 탔다. 멸치잡이가 번창하자 그는 통영에서 꼽히는 부자가 되었다. 1950년대 초 흉년으로 섬 주민들의 생존이 어렵게 되자 탁씨는 고성장에서 쌀을 구입해 상리, 탄항, 산등 그리고 하리 네 마을에 나누어 주었다. 마을의 부족한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8각형의 우물을 팠다. 시혜비 옆에 있는 우물이다. 주민들은 탁씨의 자선에 감사하며 시혜비를 세웠다.

군소를 잡는 모습
군소를 잡는 모습

숨비소리에 두리번거리다

상리 포구에서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의 주인공을 찾다 해녀를 발견했다.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다. 그녀들도 오랜만에 바다에 나온 것인지 숨비소리가 덜 익었다. 겨우내 물질을 못했다는 증거다. 소라와 해삼을 잠년 해녀들 주변으로 작은 배 두 척이 선유놀이를 하듯 여유롭게 오가며 바다를 살피다 뭔가를 건져낸다. 갈고리가 달린 긴장대에 끌려 나온 것은 군소다. 통영사람들은 꼬지에 꿰어 제사상에 올리기도 한다는 연체동물이다. 산등으로 가는 뱃길에서 두 명의 해녀를 더 만날 수 있었다. 노대도 해녀는 두 명 뿐이다. 나머지는 욕지에서 오신 분들이다. 물질을 해서 얻은 소득은 마을어촌계 40%, 해녀 30% 그리고 나머지 30%는 선주 몫으로 나눈다. 해녀들이 채취할 수 있는 것은 주로 해삼, 소라, 전복, 물미역 등이다. 갯바위에 드러난 미역이나 톳은 주민들 몫이다.

미역과 우뭇가사리와 톳은 노대도 어머니들의 섬살이에 큰 도움을 준 해조류들이다. 지금은 힘이 닿는 주민들이 능력껏 채취해 팔기도하고 상에 올리기도 한다. 옛날에는 관리 및 채취 시기, 종류, 참여인원 등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농사지을 땅은 척박하지만 갯밭은 풍성했다. 이 갯밭은 두 섬의 네 마을이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여 일구고 얻은 소득을 나누었다. 특히 해방 후 개교한 노대국민학교를 운영하는데 갯밭에서 나온 소득이 큰 역할을 했다. 지금처럼 마을별로 어장공간을 나누지 않았고 하나로 운영되었다. 학교운영과 교육비 마련이라는 섬 사람들의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양식업이 시작되자 어장을 이용을 둘러싸고 갈등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탄항과 산등 주민들의 불만이 많았고, 하리 역시 분교가 만들어지면 딴 살림을 해야 했다. 결국 어촌계는 노대어촌계로 하나지만 바다는 각각 마을 영역을 나누어 운영하고 있다. 학교는 상리에서 산등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오르기 직전 오른쪽에 있다. 이 학교는 1927년 노대영흥강습회(1927, 공태겸 설립)을 기반으로 1945년 노대국민학교가 설립되었고, 2012년 3월 폐교되었다. 남아 있는 2층 건물과 운동장이 아주 넓다. 한때 하노대도 분교 학생들까지 합쳐지면서 230여 명이 넘은 학생이 다니기도 했다.

물질을 하는 해녀
물질을 하는 해녀

호수에 펼쳐진 가두리양식장

일제강점기에 많은 일본어민과 수산가공업자와 운반업자가 조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일본과 가까운 부산이나 비슷한 어장을 가진 통영과 남해에 조선총독부와 일본의 해당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일본인 이주어촌을 조성했다. 통영에는 시내를 비롯해 미륵도, 욕지도 등에는 크고 작은 일본인 이주어촌이 만들어졌다. 당시 일본인들은 멸치, 삼치, 고등어, 민어, 대구, 장어 등을 잡아 건어, 선어, 염장으로 일본으로 운반했다. 욕지도는 물론 통영 일대에서 잡은 수산물은 노대도 대기하고 있는 화물선에 실려 일본으로 운반되었다. 노대도가 어장의 중심이자 무역선 정박하기 좋은 천연항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가두리 양식이 발달하기 전인 1970년대까지 노대도 일대는 욕지도어장과 함께 남해안의 어업전진기지였다. 어장이 좋고 배를 정박하기 좋다 보니 인근에서 조업을 하던 배들도 많이 들어와 머물렀다. 조업하기 좋지 않는 시기에는 마을에는 외지선원들도 많았다. 주민들과 외지 뱃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오면 술과 노름으로 흥청댔다. 보다 못한 부녀회에서 술집을 없애고 술을 섬에서 추방했다. 당시 금주와 도박을 없애는 새마을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와 함께 미신타파라는 이름으로 마을당제와 마을굿 등 어촌공동체의 기반도 사라졌다. 다행이 가두리 양식장이 개발되면서 노대도는 교통도 불편하고 학교도 없지만 젊은 사람들이 제법 많이 머물고 있다. 학교가 폐교되어 아이들과 가족들은 통영에서 머무는 기러기 아빠도 있다. 탄항마을의 물양장에는 컨테이너로 만든 집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머물고 있다. 모두 가두리 양식장에서 일한다.

탄항마을
탄항마을

탄항마을로 가는 길에 비릿한 냄새에 고개를 돌려보니 어머니 한 분이 채취한 미역을 널고 있었다. 겨울에 곧잘 주낙을 이용해 낙지도 잡았다는데 지난 겨울에는 한 번도 조업을 하지 않았는지 어구상태가 엉망이다.

상리에서 탄항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은 온통 구실잣밤나무 숲이다. 큰 도로를 만들면서 그 숲을 가로 질렀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잘려나갔다. 얼마나 많은 파도와 태풍을 견디며 섬사람들을 지켜냈을까. 그 고개를 상리 주민들은 탄항으로 가는 고개 ‘탄항곡’이라 하고 탄항 주민들은 노대(상리)로 가는 고개 ‘노대판’이라 한다. 상리가 섬의 중심이었다. 상리와 하리 사이의 호수같은 바다는 양식의 최적지다. 최근에는 내파성이 강한 양식재가 만들어지고 시설기술이 발전하면서 탄항마을 주변 어장으로 양식장이 확대되고 있다. 특히 탄항마을은 광주도라는 섬을 앞에 두고 좌우 무인도(비상도, 사이도)까지 가두리 양식장이 확대되고 있다.

상리마을
상리마을

상리에서 고개를 넘어 닿는 곳이 멧등개로 고개너머에 있는 포구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이곳이 산등마을이다. 산등마을에 마을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북서계절풍 두미도와 네 개의 거칠리도가 막아주기 때문이다. 안쪽 두 개는 내거칠리도(안거치리), 밖에 두 개의 섬은 외거칠리도(밖거치리)라고 한다. 거칠리도 일대는 갯바위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사철 머무는 곳이다. 안과 밖 사이로 물길이 빠르고 수중에 암초가 있어 물결이 거칠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된다. 이곳에서 참돔과 감성돔 등 대물이 곧잘 올라온다. 주민들은 통발을 놓아 돌문어와 자리돔과 장어 등을 잡고, 그물로 도다리와 돔을 건져 올린다. 노대도 봄철이 좋다. 백년을 앞둔 상리교회 뒤 산자락에서 내려다 본 호수같은 바다는 매화꽃과 잘 어우러진다. 산등마을로 넘어가는 길은 여름 전 봄에 딱 걷기 좋은 길이다. 산등마을에서 바라본 두미도와 남해바다가 아름답다. 비탈진 밭에 유채꽃이라도 피었다면 분홍색 지붕과 바다와 함께 캔버스에 옮길 수 없는 풍광이다. 네 마을 중에 빼어난 경치를 가진 마을이다.

산등마을
산등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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