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현의 양망일기 ㉕ ‘노인과 바다’, ‘백경’을 다시 읽는다
하동현의 양망일기 ㉕ ‘노인과 바다’, ‘백경’을 다시 읽는다
  • 하동현 소설가
  • 승인 2020.03.1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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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해양]

1실수로 엄지손가락을 다쳤다. ‘캡틴’ 엄지의 막중한 역할을 뼈저리게 느끼며 아무 일도 못한 채 흘려버린 한 주간.

옳거니, 책장 넘기는 정도라면 한쪽 손만으로도 가능하지 않겠나. 밴드를 칭칭 동여매고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 그리고 ‘백경(白鯨, Moby Dick)’을 다시 찾아 읽기로 했다. 이왕에 알고 있는 줄거리야 술술 풀려 나올 것이니, 편안하게 훑어나가다 종횡무진 건너뛰기에 인상적인 부분을 표시해뒀다가 다시 새기는 내 방식대로.

생물학적 기준과 가늠수치가 갈수록 모호해지지만, 다친 손가락을 물끄러미 내려 보다 피식 헛웃음에 뜬금없이 ‘노인’이란 단어를 떠올렸고, 곁다리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모비 딕’에 얽힌 어린 시절의 추억 때문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반건달들이 모여 축구동아리를 하나 결성했다. 멋들어진 작명을 고심하다가, 부모님까지 속여가며 유니폼 값 절반을 책임졌던 주장의 강력한 천거로 ‘백경’이라 정했던 기억이 난다. 실력보다 장비빨(?)을 앞세워, 흰색 윗도리에 ‘백경’이라 촌스런 고딕체로, ‘모비 딕’을 작은 글씨 영어로 새기고 다른 학교 ‘런닝구와 츄리닝’ 팀 앞에서 우쭐거렸던 기억까지. 아마도 내 백넘버는 8번이었던가.

공부와는 일찍이 담을 쌓았던 친구가 책을 읽었을리는 만무하고, 영화제목에서나 주워들은 다음에, 그저 ‘크고 흰 고래’라는 이미지와 함께 입에 감기는 꽤 강인한 느낌을 주는 발음에 끌렸지 않았나 싶다.

택했던 대학의 상징이 바로 ‘백경’이었다. ‘대학가요제’ 시절이라 한참 인기 있었던 그룹사운드는 물론이요, 동아리 명칭에도 거의가 접두어처럼 이 단어를 앞세웠다. 원고료 몇 푼에 탐을 내,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 엉터리 연애담같은 소설을 실었던 교지(校誌)의 타이틀도 그것이었다.

지금이야 뱃일에 종사하다 말석에서 글이랍시고 끄적거리는 주제다 보니, ‘해양문학’이라는 화두에 앞서 이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는 생각까지 고개를 겹쳐든다.

닳아빠진 옛날 문고판 책자들이다. 갈피에서 오래 묵은 책이나 지폐에서 풍기는, 세월의 더께가 스며든 곰팡이 향이 인다.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 ‘노인과 바다’

단순한 줄거리다. 고기잡이에 나섰다가 주야장천 ‘손가락만 빨던‘ 늙은 어부 ‘산티아고’가 84일 만에 엄청난 월척으로 청새치 한 마리를 낚는다. 일엽편주 돛배 보다 큰 고기라 배가 질질 끌려 다니는 이틀간의 사투가 벌어진다. 마침내 지쳐버린 청새치를 작살로 찔러 포획하고 배에 붙들어 매는데 기쁨도 잠시, 곧 바로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의 습격을 받는다.

칼을 매단 노를 휘두르며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물리치고 귀환하지만, 전리품이라고는 상어에게 뜯어 먹혀 머리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청새치의 잔해 뿐. 상처뿐인 영광이 따로 없다.

단출한 구성이라도 전편에 걸쳐 인간과 바다로 대변되는 자연과의 공존, 은근히 던지는 종교적인 암시로 승리와 패배의 순환을 치열하게 응시한다. 숙련된 어부였던 노인에게 일을 배우려 배에 올랐던 소년 ‘마놀린’을, ‘헛방’이 계속되자 부모가 ‘살라오(스페인어, Salao – 소금에 절었다는 의미, 최악의 불운, 바닥)’라 조롱하며 다른 배로 옮겨 태우는 대목은 가슴 아프다.

늙어 사라지는 삶과 갓 피어난 인생으로 공존과 상호의존의 분위기를 띄웠다가, 저무는 세월의 힘과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로만 결정 지워지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은 소년과의 대화, 바다, 물고기, 새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과 독백에서 나타나고, 엔딩장면을 포함해 몇 번 등장하는 ‘사자 꿈’은 처참한 결과마저 짊어지고 묵묵히 나아가는 게 우리 삶이라는 은유를 보낸다. ‘널빤지가 뚫려 손에 못이 박힘’과, 귀항해서 돛을 걸머지고 언덕을 오르는 장면은 예수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뼈만 남은 청새치의 잔해는 ‘허무’의 상징이다. 상어에게 뜯어 먹히지 않고 온전한 고기를 팔아 돈벌이가 되었다면, 노벨상까지는 가지 못했으리라는 주제넘은 상상이 ‘과욕’에 대한 교훈으로까지 탈바꿈한다.

언제 어느 때고 복병처럼 출현하는 현실적인 시련과 고난,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지만 희망을 지닌 채 용기로 맞서는 것이 올바른 삶의 자세라는, 다소 고리타분(?)한 교훈을 비유와 상징을 통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옥의 티’랄까 시대와 규모가 다르다는 전제가 있어야하지만, 어법상 수면위로 부상할 때 주낚이 쉬 벗겨진다는 청새치의 특성을 간과한 것과, 헤라클레스의 힘을 연상시키듯 청새치가 며칠을 배를 끌고 가는 약간 과장된 표현에 웃을 수 있음은 오리지날 뱃놈출신으로서의 작은 재미다.

몇 공감이 가는 대사를 내 표현대로 각색해 옮겨본다.

-나는 미끼를 정확하게 놓는다.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죄악이기도 하다, 누가 아는가?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니 오늘은 운이 따를지를, 믿음을 가져야 해.

-방금 자신이 겸손하게 행동한 걸 알았고,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며 그것으로 진정한 자존심이 손상되지도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악에 맞선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선한 것만은 아니다.

-매 순간이 새로운 순간이고, 그것을 입증할 때 과거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작가인 헤밍웨이는 장대한 기골에 훤칠한 외모, ‘마초 맨’ 스타일로 술과 모험을 즐겼다. 투우, 사냥과 낚시, 전쟁 같은 역동적인 경험에 섬세한 인간애가 담긴 감각을 실어, ‘하드보일드’라 일컫는 강건한 문체로 불멸의 대작들을 남겼다. ‘폭력과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진 현실세계에서, 선한 싸움을 벌이는 모든 개인에 대한 자연스러운 존경심’, 노벨상 선정위원회가 말한 선정이유다.

안타깝게도 구원적 의미를 지닌 문장들과는 달리, 여성편력, 고독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부와 명예, 권력도 그의 텅 빈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을까.

그의 다른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에 이런 글귀가 보인다.

‘……킬리만자로, 그 서쪽 정상에는 얼어붙은 한 마리 표범의 시체가 있다. 도대체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은 무엇을 찾고 있었던가? 아무도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향락과 안일에 젖어, 작가로서 재능과 인생을 낭비한 죄를 고통 속에 후회하는 소설 속 주인공의 심사. 나같이 게으른 늦깎이 글쟁이에게도 섬뜩한 경종을 울리는 문장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당하지 않는 고래여, 그럴지라도 나는 너를 향해 돌진한다(Towards thee I roll, thou all-destroying but unconquering whale). - ‘모비 딕’

거북한 소설이다.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고래의 생태와 박물학, 포경업 전반에 걸친 방대한 논문 같은 서술은 피곤하고 지루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시건방진 기시감까지 몰입을 방해한다. 그래서 나는 독서에도 축약판과 건너뛰기의 효용을 믿는 사람이다.

줄거리는 이런 뼈대로 나뉜다. 고래와 포경업에 대한 고찰적 서술, 신출내기 선원 ‘이스마엘’의 행적과 나레이션, 흰 고래에 다리를 잃은 선장의 광기와 복수의 집념, 고래를 추적하는 과정과 선장은 작살 줄에 휘감겨 고래와 함께 사라지고 배는 난파되어 화자만 살아남는다는 처참한 엔딩.

1820년 포경선 ‘에섹스(Essex)’호가 향유고래의 공격으로 침몰한 사실과, 선원들이 죽은 동료의 인육을 먹으며 표류하다 구조되고, 생존자인 1등항해사가 쓴 ‘에섹스호의 침몰’이 작품의 모티브였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Call me Ishmael, ‘나를 이스마엘이라 불러라’ 또는 ‘내 이름을 그저 이스마엘이라 해 두자’ 같이 번역되는 첫 문장은, 소설기법상 독자의 관심을 촉발시키는 명문장으로 꼽힌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세계유수의 커피체인점 작명에 영감을 준, 냉철하고 합리적인 1등항해사 스타벅(Starbuck)이 권총까지 들이대며 명령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선장에게 던진 대사다.

‘당신은 나에게 분노했지만 나를 모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경계(조심, 또는 두려워)하세요.’

당대에 인정받지 못했던 작품이라 작가 스스로가 구체적인 의도나 해설을 남긴 바 없으나, 후세의 평론들이 고래와 포경선을 신과 인간, 선과 악의 대립구도로 상치시켰다는 데는 대체적으로 이견이 없는 것 같다.

작가가 존재했던 시대상황을 담아냈다는 시각이 있는데, 초일류 강국으로 도약하고픈 미국의 야망을 포경산업을 통한 자본주의의 팽창과 파괴적 면모로 읽었다는 해석이다.

노예제도, 빈부격차와 경제 불균형을 당시 미국사회의 병폐로 본 깨어있던(?) 사람이었다 하니, 모비 딕이 ‘흙수저’ 인간들에게 떨치기 힘든 상처와 한을 제공한 산업사회의 거대한 벽이고, 그로 인해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을 대신해 선장을 처절한 의지로 그에 저항하려는 인물로 그렸다는 추론이다. 용기와 정의를 광기와 집념으로 치환했다는 말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역설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특이한 점은 고래를 발견하는 선원에게 줄 상금으로 금화를 제시하는 ‘에이헙(Ahab)’ 선장은 우상숭배와 악행을 저지른 구약의 폭군이며, ‘이스마엘’은 광야로 쫓겨 난 ‘아브라함’의 아들로 성서 상의 인물들이다.

이러한 의도적인(?) 작명으로 인해, 대자연과 하늘의 섭리를 상징하는 흰 고래를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신성(神性)’으로 읽히게 하고, 선장의 광기는 절대적 존재나 가치에 대한 무모한 도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약자 집단인 선원들이 선장에게 굴복하고 길들여지는 계급구조의 모순도 지적하고 있다.

아주 독특한 해석도 있다. 포경선의 이름 ‘피쿼드(Pequod)’가 백인에게 학살당한 미국 북동부 원주민 부족명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서, 가장 강한 영적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흰색을 내세워 인류 운명을 주도하는 기독교에 기반한 백인 문명의 비대함을 조준했다는 시각이다.

여자가 등장하지 않는 이 터프한 소설을 다시 읽으며 찾아낸 몇 가지 인상적인 것들을 꼽아보자. 고래의 종(種)에 관한 서술에서 포유류와 어류의 혼돈정도는 시대가 달랐으니 이해하고 넘어가야하고, 딱 지금의 내 나이인 선장을 ‘영감님’이라 호칭하는 데서는 실소를 흘렸으며,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종 선원들과 ‘이스마엘’의 친밀감은 노예제도 시대에 쓰여 진 작품 치고 대단히 진보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좌우간 작품보다 해설들이 더 거북하고 알쏭달쏭이다. 어차피 해석은 독자들 각자의 몫이 아닌가.

시각효과와 사운드의 힘, 동명으로 제작된 영화들을 추억하는 편이 더 홀가분할 수 있겠다. ‘노인’역 ‘안소니 퀸’의 세상풍파를 다 겪고 바다를 응시하는 허무와 강렬함이 교차하는 눈빛이 먼저. 그리고 열 받은 링컨대통령을 연상시킨다는 방자한 우스개가 있지만, ‘로마의 휴일’에서 느끼한 정형미남 이미지를 벗어던진 ‘그레고리 펙’이 얼굴에 번개 흉터를 달고 지팡이를 휘두르며 광기를 발산하는 ‘캡틴 에이헙’, 대배우들의 혼신을 바친 연기가 빛바랜 흑백사진들처럼 떠오른다.

‘게으른 선비 책장만 넘기기’, 옛날 책이다 보니 가독성이 떨어지는 거친 인쇄와 지질(紙質), 밋밋한 번역을 아쉬워하며 스토리텔링 부분만 겨우 완독을 마쳤다. 새삼스럽고 별다른 감흥보다, 며칠간이라도 다시 바다에 정신 줄을 질펀하게 붙들어 매 둔 것에 자위하면서.

책장을 접자 솟아올랐다 부서지는 파도처럼, 엄지 끝으로 살아있는 것들만이 느낄 수 있는 초라한아픔이 출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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