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㉕ “물메기 많이 들게 해주이소”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㉕ “물메기 많이 들게 해주이소”
  • 김준 박사
  • 승인 2020.03.1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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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시 사량면 능양리
통발조업을 하는 모습
통발조업을 하는 모습

[현대해양] 통영 능량마을 박씨는 요즘 걱정이다. 올해 겨울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했다. 박씨가 짓는 겨울농사는 바다농사다. 특히 겨울 한철 물메기 잡아 일 년 생활을 한다. 박씨만 아니라 사량도 상도와 하도 주민들 중 바다에 의존하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겨울철 물메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 겨울은 물메기 구경도하기도 힘들다며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굿이라도 한판 해야 할 판이다. 정말로 금년 정월에는 10년 만에 별신굿이 펼쳐졌다. 신종코로나가 기세를 부리기 전이어서 천만 다행이었다.

굿도 보고 떡도 얻어먹자는 심산으로 사량도로 향했다. 사량도로 들어가는 뱃길은 가오치여객선터미널, 통영여객선터미널, 삼천포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한다. 상도와 하도가 연도교로 연결되어 두 섬을 돌아 볼 수 있지만 대부분 여행객들은 대부분 상도를 중심으로 섬여행을 한다. 사량도를 찾는 여행객들은 대부분 등산객이다. 상도의 지리산부터 옥녀봉까지 이어지는 암벽능선과 하도의 칠현산 주봉을 돌아보는 등산이다.

별신굿이 열리는 양지리는 통영시 사량면 사량도 하도에 위치해 있으며 능양마을과 백학마을 두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능양마을은 65가구 거주하는 마을로 사량도에서는 큰 마을이다. 한 때 초등학생만 500여 명에 이르렀다. 능양항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능양과 백학 두 마을을 안쪽에 위치한 국가어항이다. 1971년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어 1987년 기본시설이 완공되었다.

 

어촌마을 시인들 안녕하실까

2010년 어촌 시인마을 사업 결과물
2010년 어촌 시인마을 사업 결과물

능양마을은 2010년 어촌 시인마을로 주목을 받았다. 그 무렵 사량도를 방문했을 때 선창의 냉동창고가 색색이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고, 그 위에 ‘섬마을에 웃음꽃이 활짝피네’라는 글씨와 함께 시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통영 극단의 벅수골이 생활문화공동체만들기 시범사업으로 마을 주민들과 준비한 것들이었다. 당시 주민들의 섬살이를 조사하고 시와 연극과 그림으로 표현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중에 ‘사량 고구마가 물메기를 만날 때’라는 서길수 주민의 시다.

사량 고구마가 물메기를 만날 때 / 서길수

(중략) 오래전 고메와 물메기는 / 굳이 자랑도 상표가 없어도 알아주는 / 사량도의 대표적 특산물 / 그러는 사이 ‘욕지고구마’, ‘추도 물메기’가 / 상표로 날개 달아 유명세 타고 /전국으로 팔려간다 / 욕시섬 이나, 추도섬 이나, 바다의 땅 통영 이지만 / 그래도 고구마와 물메기는 / 사량도가 본산이고 맛과 질이 다르다. (중략)

이웃 섬에 뒤지지 않는데 특산품으로 만들지 못한 아쉬움을 표현한 시다. 이외에도 섬으로 시집와서 살게 된 할머니의 사연, 일제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섬마을로 시집온 사연 등 섬살이를 오롯이 시와 그림 그리고 연극으로 꾸몄다. 그리고 딱 10년 만에 다시 별신굿으로 주민들이 들썩였다.

 

당산제를 지내고 골메기굿을 하는 모습
당산제를 지내고 골메기굿을 하는 모습

마을잔치, 별신굿

능량마을 별신굿은 10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마을굿이다. 보통 별신굿은 길게는 일주일을 하기도 하지만 이곳에서는 이틀에 걸쳐 이루어진다. 게다가 10년만에 열리는 얼마나 귀한 굿인가. 남해안에서 별신굿이 열리는 곳은 통영시 죽도와 사량도 그리고 거제시 죽림마을 세 곳이다. 하지만 사량도는 10년에 한번씩, 죽도와 죽림마을은 2년에 한번씩 개최되고 있다. 죽도에서는 마을의 대소사를 비롯한 마을역사를 기록한 문서를 보관하는 ‘지동궤’를 모시고 하는 지동굿이 큰 곳이다. 하지만 능량마을에서는 지동궤가 없는 대신에 ‘말미굿’이라는 큰 굿을 한다. 이 굿은 지동굿과 마찬가지로 ‘마을조상을 기리며, 마을의 안녕과 재수를 기원’하는 굿이다. 그리고 손님풀이라고 옛날 큰 병마였던 손님을 모시고 오히려 인간들을 모든 병에서 보호달라고 기원하는 굿이다.

별신굿을 하고 있는 지모에게 축원을 드리는 주민들
별신굿을 하고 있는 지모에게 축원을 드리는 주민들

박씨는 한국전쟁 전에는 매년 마을주민들이 풍물을 치며 당산제도 지내고 마을굿을 했다고 기억했다. 이후 경제적인 부담과 책임지려는 사람이 나서지 않아 10년에 한 번씩 무당을 불러 하고 있다고 한다. <남해안별신굿보존회>에서 마련한 자료에 따르면, 능량마을별신굿은 첫날은 당산굿, 부정굿, 가망굿, 제석굿, 선왕굿, 대풀이 순으로 이어지며, 다음날 서낭대를 들고 당산에서 신들을 모시고 우물과 마을을 돌며 안택을 위한 지신밟기와 용맞이굿을 하는 골메기굿으로 이어진다. 이후 손말미굿, 고금역대, 환생탄일, 황천문답, 축문(열두축문), 시왕탄일, 대신풀이(신살풀이), 군웅굿, 시석으로 마무리한다. 이중 손말미굿이 가장 큰 굿이다. 굿이 끝나면 소지를 올리고 헌식을 하며 오색기를 매단 배를 바다로 끌고 나가 풍어를 축원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굿을 하는 동안 중간에 주민들이 복채를 놓고 치성을 드리는 장면도 볼 수 있다. 박씨도 만 원짜리 몇 장을 들고 굿을 하는 지모 앞으로 다가갔다. 부채 위에 돈을 놓고 두손을 모아 조그마한 소리로 ‘금년에는 물메기 많이 들게 해주이소, 낙지도 많이 잡게 해주이소, 자식들 건강하게 해주이소’라며 머리를 숙였다. 더 이상 뭘 바라겠는가. 무엇보다 백미는 올해 삼재에 든 사람들을 모두 굿청 앞으로 불러 살을 풀어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민들과 굿패들이 함께 어우러져 한마당 잔치를 벌인다.

 

능양항에 오색기를 꽂은 배들
능양항에 오색기를 꽂은 배들

 

바다농사는 기다림이다

양지마을 주민들은 요즘 울상이다. 겨울철에 통발에 미기가 들어야 신이 나고 주낙에 낙지가 걸려야 흥이 날 텐데. 미기는 물메기, 꼼치를 이르는 지역말이다. 올해는 미기는 종자를 구하기도 힘들 판이고, 낙지는 구경한지 오래되었다. 그 동안 겨울 한철 벌어 일 년 산다고 할 만큼 쏠쏠했다. 그런데 2, 3년 전부터 심상치가 않더니 금년에는 아주 바닥이다. 통발 하나에 두 마리가 들기도 할 정도로 미기가 많이 들었는데 얼마 전 바다에 나갔다가 40여 개 통발을 건져 겨우 미기 한 마리 꺼냈다. 이렇게 해서는 어민들 먹고 살기 힘들다. 양지마을만 겪는 어려움이 아니다. 사량도 상도와 하도 모두 겪고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낙지를 잡는 서해안과 달리 사량도를 비롯해 남해안에서는 겨울철에 본격적으로 낙지잡이가 시작된다. 사량도의 낙지잡이는 낙지주낙으로 돌게(반짝게라고도 함)를 미끼로 잡는다. 서해안과 달리 여름철에는 낙지가 전혀 잡히지 않는다. 봄에는 도다리를 잡고, 여름에 시작한 문어잡이는 가을까지 이어진다.

능양항은 낚시객들이 많이 찾는 어항이다. 능양마을과 백학마을을 지나 하도의 도로끝이 통단마을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어항은 물론 해안이 모두 낚시 포인트라 할 정도이며 경관이 빼어나다. 이른 봄부터 잡기 시작하는 볼락을 비롯해 노래미, 도미, 넙치 그리고 여름에는 감성돔과 놀래미, 가을에는 삼치와 농어 그리고 겨울에는 볼락과 감성돔이 많이 잡힌다.

매년 이렇게 물메기가 잡히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에, 박씨는 ‘수온이 바뀌면 다시 물메기도 낙지도 올 것’이라고 믿었다. 한두 해 고기잡이 하고 말 것도 아닌데 기다리면 기회가 또 온다는 말이다.

능양항 앞 어장
능양항 앞 어장

충무공이 머물렀던 마을

다리가 연결되었지만 하도를 찾는 사람은 적다. 하지만 상도의 지리망산이나 옥녀봉을 오롯이 보려면 칠현봉에 올라야 한다. 상도만큼은 아니지만 만만치 않는 바위능선이다. 한걸음 한걸음 높이 오를수록 두미도, 노대도, 연화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번에 선택한 길은 사량대교에서 칠현봉을 거쳐 망봉과 용두봉 그리고 읍포로 내려오는 세 시간 코스다. 내려오는 길도 오르는 길 만큼이나 급경사다. 더 긴 산행을 원한다면 읍포 아니라 양지리나 통포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선택했던 것은 칠현산으로 가는 암릉 중간에 있는 봉화대를 보기 위해서다. 양지리 앞 바다에서 하룻밤을 묵은 충무공도 필연코 이곳에 병사를 배치해 당포를 장악한 왜군의 동태를 살폈을 것이다.

<난중일기> 임진년 6월 1일에 이렇게 기록 되어 있다. ‘맑음. 사량(양지리) 뒷바다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 출발하여 곧장 당포 앞 선창에 이르니, 왜적 20여 척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라고 적었다. 이 전투가 당포해전이다. 그러니까 당포해전을 앞두고 통영으로 가는 길목 사량도 하도 양지리에 능양항에서 진을 치고 머물렀던 곳이다. 양지리에서 당포까지는 약 12키로미터 남짓 되는 거리이며, 지금도 마을 뒤 칠현봉은 봉화대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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