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바다 지켜온 선각자들 제5회
쪽빛 바다 지켜온 선각자들 제5회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4.02.19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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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부 거진에서 백령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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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수협의 ‘100억 원 자체자금 조성’이라는 원대한 자립책(自立策)은 먼저 전국에 산재한 어촌마다 하나 빠짐없이 신용조합(信用組合)을 결성하는 일로부터 시작됐다. 당시까지 전국 어촌을 통틀어 어민을 주인으로 한 신용조합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고, 주목한 사람도 없었으며, 그 효능에 대해서도 도무지 깜깜 절벽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64년 전인 1850년, 독일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이후 유럽 각국을 거쳐 대서양을 건넌 캐나다 남동부 ‘노바 스코샤(Nova Scotia)’라는 주(洲)에 이르면서 불꽃처럼 타오른 언필칭 ‘가난 물리치기 운동’이었다. 노바 스코샤는 세계 3대 어장의 하나인 뉴펀들랜드 섬을 낀 매우 훌륭한 환경의 어촌이었지만, 어떻게 된 셈인지 어민들은 맨날 술에 찌든 채 출어를 마다하고 있었으니 희망이니 부흥이니 하는 말은 그저 딴 세상의 사치스러운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세 끼 식단도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어촌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북위 45도 선인 그곳 동토지대에 한파 휘몰아치는 한겨울이면 동사자(凍死者)가 속출해 주민들은 따뜻한 나라를 찾아 보따리를 싸는 게 유행일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특단의 대책이 마련되지 못한다면 유럽 이민자들의 주요 정착지인 노바 스코샤는 머지않아 황량한 무인지대로 전락하고 말 처지였다.

그런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그곳 ‘안티고니시’ 마을에 선각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세인트 프란시스 새비어’라는 이름의 가톨릭계 대학 소속 신부들로, 희망을 잃은 주민들을 상대로 잘 살기 운동을 선도함으로써 끝내 가난을 물리치고 근심걱정 없는 부촌(富村)으로 면모일신시키는 기적을 이뤄 낸 것이었다.

당시 캐나다 신부들이 이끈 그 ‘잘 살기 운동’이야말로 독일에서 움튼 신용협동조합의 전형이었다. 그 결과 오늘날에 이르러 가톨릭 신부들에 의한 노바 스코샤 안티고니쉬 어촌이야말로 세계적 신용조합의 모범 사례로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그 100년 후인 1960년 부산 메리놀 수녀회의 ‘메리 가브리아’ 수녀들에 의한 ‘성가신용협동조합’이 그 효시로 알려지고 있다).

신용조합이란 상호 유대를 가진, 그러나 가난하기 짝이 없는 불행한 처지의 사람들이 결성한 협동·조직체로, 그들은 십시일반 자체적으로 조성한 자금을 바탕으로 저축을 유도하고 돈을 빌려주면서 끝내 조직원들의 경제와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비영리·비자선 단체이다. 따라서 비록 일반 금융기관에서는 대출이 어렵더라도 조합원이라면 얼마든지 그 문호가 열려 있어서 어려움에 처한 처지에서는 더 이상 바랄 나위 없는 든든한 금고인 것이었다.

바로 그 운동에 주목한 박 회장은 그 운동을 자신이 추구하는 수협 내지는 어촌 부흥에 접목시키기로 하였는데, 그에 대한 박 회장의 소회가 그의 저서(<나와 3·4 공화국>)에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어 이를 인용한다.
- ……수십 년래 일제와 객주들의 수탈로 궁지에 몰린 우리 어민들은 그 후유증으로 뱃놈이라는 자괴감과 낙망감으로 자포자기해진 나머지, 출어가 없는 날이면 오로지 술과 노름과 여자로 하루해를 보내는 게 일과였다. 그리하여 내일 당장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히려 그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우선 술병 마개부터 따는 게 유일한 탈출로이자 자기위안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판국에서 협동이니 저축이니 하는 말은 그들에게 다만 목탁을 두들기며 염불하는 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비뚤어진 정신세계부터 확 뜯어 고쳐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긍지와 자신감을 부여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도록 해야 한다. 정직과 근검절약하는 정신, 그게 곧 협동조합의 뜻이자 사명이 아니던가. 그래야만 전국 150만 어민 모두가 고귀한 삶의 진수를 만끽하게 될 터였다.……

박 회장은 곧 실행에 들어갔는데, 그 첫 번째가 1969년 정초 소집한 전국 일선 조합 책임자들에게 올 연말까지 무슨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반드시 흑자경영을 이루도록 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 과정에서 못된 술수와 반칙은 용서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독자적으로 실현하되, 행여 조합 상호간 출자와 차입에 의한 장부상의 흑자를 내미는 경우 사실여부를 따져 엄중히 문책하겠다고까지 강조했다. 그게 곧 독립채산제의 골간이자 핵심인 것이었다.

회의장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럴 것이, 그 때는 이미 중앙회 자체 구조조정과 전국 어업조합의 정비작업(통폐합)이 깨끗하게 마무리된 때여서,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염라대왕의 그것보다 더 지엄하기 짝이 없어 소속원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분위기가 팽배한 때문이었다.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근검절약과 내핍을 업으로 삼고, 한 푼의 이익이 생기는 일이라면 마다 않고 뛰어들어 땀 흘린 결과 그 해 연말 결산에서 구심체인 중앙회부터 사상 최초로 7000여 만 원의 흑자를 기록하는 기적이 일어난 게 그것이었다.

하지만 전국에 산재한 일선 조합은 기대치에 미치지 못 했다. 전체 127개 조합 가운데 3분의 1 남짓한 40여 개만 겨우 쥐꼬리만 한 이익을 남겼을 뿐, 나머지는 여전히 적자라는 붉은 글자를 지우지 못 하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연전에 비해 그 폭을 상당히 좁히고 있어서 내년을 기약해 보자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수협의 거보(巨步)는 내디뎌졌다. 100억 원 자체자금 조성이라는 저 높고 높은 고지를 향해!

<이하 내용은 월간 현대해양 2011년 4월호(통권 492호)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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