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함(絶檻)의 고사와 간언(諫言)
절함(絶檻)의 고사와 간언(諫言)
  • 이준후 시인/산업은행 부장
  • 승인 2014.02.19 14: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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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후 시인/산업은행 부장
절함(絶檻)이란 말이 있습니다. 난간(檻)을 부러뜨린다(絶)는 뜻입니다. 그 유래는 이렇습니다. 중국 전한(前漢)의 12대 황제 성제(成帝)때, 정승 장우(張禹)는 황제의 어린 시절 스승이었던 인연으로 지나친 위세를 부렸습니다. 이에 주운(朱雲)이라는 관리가 글을 올려 탄핵했습니다. ‘원컨대 상방검(上方劍)을 빌어 영신(佞臣) 장우를 베소서’ 하니, 황제는 대노(大怒)했습니다. “하급 관리가 정승을 비방하고 왕의 사부(師傅)를 모욕해? 당장 끌어내라!”

조회에 참석한 주운을 무관들이 끌어내려고 우르르 달려들었습니다. 주운은 전각 난간을 결사적으로 붙들고, 장우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계속 소리쳤습니다. 그 와중에 전각 난간이 그만 뚝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신하들의 적극적인 만류로 주운은 간신히 죄를 면했습니다. 후일 손상된 난간을 교체하려고 하자 황제가 말했습니다. “바꾸지 말고 부서진 것을 그대로 붙여 놓아라. 직간한 신하의 충성의 표징으로 아끼고 싶구나.”

당 태종 이세민은 명군(名君)으로, 그의 치세는 ‘정관지치(貞觀之治’’라 해 성공한 통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간관(諫官) 위징(魏徵)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원래 위징은 태종과 제위 다툼을 벌이다 죽은 이세민의 친형 이건성(李建成)을 보좌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태종은 위징을 발탁하고 과감하게 중용했습니다. 위징은 직간(直諫)을 거듭해 황제의 분노를 샀지만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태종이 사냥을 나가려고 말을 준비시켰다가 이윽고 취소했습니다. 위징이 이유를 묻자 황제가 대답했습니다. “그대에게 야단맞을 일이 두려워서 포기했소.”

사냥을 좋아하는 태종이 매 한 마리를 헌상 받고는 팔위에 올려두고서 몹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위징이 다가오자 잔소리를 들을까봐 매를 품속에 넣었습니다. 황제가 매에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못마땅했던 위징은 일부러 시간을 끌었고 결국 매는 태종의 품속에서 질식해 죽었습니다.

위징의 간언에 입맛을 잃을 정도였지만 태종은 한 번도 물리치지 않았습니다. 위징이 죽었을 때 “나는 이제 거울을 잃었다”하며 탄식했습니다. 태종은 고구려 원정에서 참패를 당한 후 귀국하면서 “위징이 살아있었다면 나한테 이런 걸음을 하게 하지 않았을 텐데(魏征若在 不使我有是行也)”라고 했습니다.

황희(黃喜)는 조선 최고의 정승이자, 최고의 간관이었습니다. 두문동 72賢의 대표로 혼자 조선에 출사(出仕)한 황희는 곧 태종의 총애를 받아 6조 판서를 모두 거칩니다. 그러나 그는 세자 양녕대군의 폐위를 세 번에 걸쳐 반대합니다. 적장자 승계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간언의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태종의 노여움을 샀고 급기야 서인(庶人)이 돼 유배를 갑니다.

그의 유배기간은 파주 교하를 거쳐 남원까지 5년에 이릅니다. 광한루(廣寒樓)는 황희가 남원 유배 중에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세종은 즉위 후 자신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던 황희를 불러들였습니다. 세종에서 문종에 걸쳐 정승으로 24년, 황희는 조선 최장기 정승이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간언을 하고 무사하기 어렵습니다. 공자(孔子)는 다섯 가지 요령을 말했습니다. 첫째는 정간(正諫), 정당하고 바르게 간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항간(降諫), 자기 자신을 최대한 낮추어 간하는 것이며, 셋째는 충간(忠諫), 충심을 가지고 간하는 것이다. 넷째는 당간(戇諫), 고지식하며 우직하게 간언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풍간(諷諫)으로 비유를 들어 깨우치도록 유도하는 방법입니다. 공자는 “나는 풍간(諷諫)을 따르리라”라고 했습니다.

‘적자생존’이란 말이 유행입니다. 받아 적기에 열중인 고관대작들의 모습을 비꼬는 말입니다. 토론이 없고 간언이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식이 없어서? 아니겠지요. 아니면 자리에 오래 앉아 있고 싶어서? 설마 그런 것은 아닐 테지요. 효율적인 회의를 위해서? 알 수 없습니다. 2009년 중국의 삼협댐 건설이 완공된 후 건설책임자가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댐 건설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댐 건설의 비판자들이었다. 그들의 비판으로 예상문제를 미리 해결할 수 있었다”라고.

간언(諫言), 쉽지 않습니다. 과거 왕조시대에는 목숨을 내놓아야 했고 지금은 자리를 내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간언은 해야 합니다. “간언(諫言)을 하면 자신이 위태롭지만, 간언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롭다” 간언의 달인 위징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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