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현의 양망일기 ㉔ 잠들지 않는 항구
하동현의 양망일기 ㉔ 잠들지 않는 항구
  • 하동현 소설가
  • 승인 2020.02.06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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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전 라스팔마스, 영원히 잠들지 않는 ‘천사와 악마의 항구’에서 겪은 몇 가지 기억들이다.

- 장편수기 ‘마린보이의 꿈’에서 일부 발췌, 재구성한 글이다.

 

1 테네리페(Tenerife).

선저 도색작업과 추진기(스크루) 점검을 위해 서쪽 옆 섬 ‘테네리페’의 ‘누바사’ 독킹장(Dry dock - 乾船渠)으로 첫 시험항해를 했다.

17세기에 건립된 종합대학이 있을 정도로 라스팔마스와 약간 다른 차분한 분위기가 있는 섬이며, 최근에는 TV프로 ‘윤식당 – 스페인 편’의 배경이 된 ‘가라치코’ 마을로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한 지명이 된 곳이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했던 영국의 넬슨 제독이 이곳 테네리페 해전에서는 치열한 전투로 총탄에 오른팔을 잃었다는 역사를 가진 곳. 1977년, 폭탄테러 위협으로 폐쇄된 라스팔마스 공항을 우회한 비행기 두 대가, 이 섬의 ‘로스로데오’ 공항에서 짙은 안개와 교신오류로 충돌해 육백 명 가까운 인명이 희생된 역대 최악의 항공참사로도 유명하다.

레일형태 거대한 경사 도르래를 이용해 육지로 배를 끌어올렸다. 팔뚝 굵기 무링라인(계류색)을 어깨에 걸머지고 뱃전을 날아다니듯 하는 우리선원들을 보고 현지인들이 혀를 내둘렀다.

“시, 마리네로스 꼬레아노. 꼬모 모노스(역시 한국선원들이네. 마치 원숭이들 같아)…….”

결코 동양인들에 대한 외모비하성 발언이 아니라,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일사불란하고 날랜 동작에 대한 찬사였다.

촉박한 일정이라 한 주간의 체류기간 중 유명한 ‘테이데(Teide)’ 화산 국립공원의 케이블카 관광이나, 검은 색 모래가 깔려있다는 ‘칸델라리아’ 해변도 가보지 못했다. 일과 후 산책삼아 잠깐 시내를 둘러보다 노천카페에서 들이키는 맥주 한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도로에 주차된 고급승용차를 만져보다 도난방지 경적이 울려 온 거리가 뒤집히는 바람에 한 선원이 경찰에 끌려갔다 풀려났고, 샤워장을 같이 사용하던 모로코 선원들과 가벼운 충돌로 결국 따로 배정받는 해프닝이 있었다.

한국선원들에게 둘러싸여 혼자 부끄러운 듯 가운으로 몸을 가리고 얌전히 씻고 있던 모로코 선원에게, 물건 크기가 자신이 없어 그러냐는 시늉으로 새끼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장난을 걸다 시비가 붙었다. 뒤이어 옷을 벗고 들이닥친 모로코 선원들에게 일순간에 고개를 숙이며 깨끗하게 사과했단다. 전말을 전해들은 갑판장이 껄껄거렸다.

“당연히 상대가 안 되지 이놈들아. 그놈들 것 거짓말 안보태고 우리 것 두 배다 두 배…….”

선저부분 점검을 마치고 출항준비를 위해 다시 모항인 라스팔마스로 돌아와야 했다. 영단어 기회(Opportunity)의 어원은 라틴어 ‘ob portu(항구 밖에서)’로부터 유래한다. 바람과 밀물 때를 맞춰 항구가 열렸기 때문. 뱃놈들에게 항구란 적절한 기회를 포착하고, 언제나 다시 떠나기 위한 채비를 차리는 곳이었다.

 

봄날은 간다.

마무리 수리작업에 쳇바퀴 돌 듯 하는 일과였다.

외출 때면 하릴없이 백화점 ‘콜데 잉글레스’ 근처를 배회하거나 ‘깐데라스’ 해변에 퍼질러 앉아 ‘트로피칼’ 맥주를 마셨다. 해가 지면 왁자지껄 사투리에 관람객의 태반이 한국선원들인 싸구려 극장에 들른다. 여자에게 비밀을 털어놓음으로서 결국은 죽고 마는, 그렇고 그런 B급 스파이 스토리 스페인영화를 감상한다. 대사나 줄거리는 애초부터 관심도 없었다. 자욱한 ‘코로나’ 담배연기 속에 선하품을 해대며 졸았다 깼다 시간을 죽여야 했다.

야심한 시각이면 또 시계추처럼 주점으로 향한다. 하루의 마감처럼 몇 잔 술을 마시며 ‘플라밍고’춤 공연이나 구경하다 배로 돌아오는 날들이었다. 모두가 부득이한 일정에 미리 떠나보낸 강아지 ‘한국이’를 그리워했다.

선배 몇과 술집에 들른 어느 날, 세련된 옷차림에 눈매가 깊은 한국인 아가씨를 만났다. ‘세뇨리따 정(미스 정)’. 이역만리 외국항구에서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는 여자와 마주쳤지만 의아해 할 것도 없었다. 엉터리 무용단으로 위장한 해외공연 단체모집에 속아 끌려 왔을 거라는 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숨은 사연들이 있을 것이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저 뱃놈은 뱃놈일 뿐이고 주점 여급은 여급일 뿐, 서로의 신상에 관해서는 깊이 묻지도 답하지도 않는다는 묵계가 존재했다. 왜였을까. 고장 난 차에 함께 탑승한 승객들처럼 불편한 분위기였다.

그녀도 우리를 거북해하는 낯빛이 역력했다. 짙은 화장에 줄담배였고 어두운 실내조명 탓인지 실루엣이 처연했다.

돌이켜보니 그때 우리는 술 자체보다 취한 상태를 더 즐기고 원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채워보기도 전에 이미 텅 비어버린 것 같은 청춘, 도대체가 오리무중인 새파랗게 젊은 나이가 그러했고, 언제 어디서나 떠날 채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뱃놈의 숙명마저 그런 성향을 부추기지 않았을까.

궁한 대화에 술만 들이붓다 누군가가 불쑥 그녀에게 노래를 청했다. 우리가 지불할 술값에 대해 합당한 책무를 하달 받았고, 어색한 분위기에 그게 아예 다행이라는 듯 그녀는 보이지 않는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봄날은 간다’를 불렀다.

익숙한 1절을 시늉으로 따라 흥얼거렸다. 그녀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가사가 생소한 3절까지 이어 불렀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그늘지고 허스키한 음성의 노래는 구슬펐다. 반쯤 취한 내 눈에 노래를 마친 그녀의 눈자위가 붉어져보였다. 우리는 그 노래에 잠시 쓸쓸했다가, 밀물처럼 들이닥칠 것 같은 암울한 분위기가 두려워 바다를 떠도는 뱃놈의 삶에 대해 큰 목소리로 허풍을 떨기 시작했다.

이 죽일 놈의 운명에 이끌려, 지구 반대편 항구에 떨어뜨려진 우리도 지나버린 과거나 꿈같은 것들을 말하지 않았다. 과장된 몸짓으로 객쩍은 농담들을 쏟아냈지만 이내 분위기는 다시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취한 일행들을 일으켜 세우고 한 선배가 주머니에서 집히는 대로 팁을 내밀었다. 공손하게 두 손으로 구겨진 지폐들을 받은 그녀는 표정 없는 낯빛 그대로, 외워둔 접대용멘트를 낭독하듯 안전한 뱃길을 기원한다는 건조한 인사치례를 남기고 천천히 일어서서 룸을 나갔다.

비린내 등청하는 어선 전용부두로 돌아오는 길, 선배가 피우던 담배를 방파제를 향해 집어던지며 씁쓸한 농담 같은 말을 내뱉었다.

“저 친구들도 훌륭한 애국자 대접을 받아야 할 것이네. 허허,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는가. 우리같은 뱃놈이나 저 아이들이나 바로 외화획득의 선봉장들 아닌가…….”

비슷한 시기 독일에 파견되었던 광부와 간호사들이 국내로 송금하는 액수의 스무 배 가까운 규모에, 지금의 반도체와 자동차를 합한 비중으로 우리나라 수출액 15퍼센트를 상회하는 외화를 원양어업에서 벌어들일 때였다.

광부든 간호사든, 외항선과 원양선원들, 월남전 파병용사들과 사막의 모래바람을 견딘 건설인력들이든, 모두 저마다의 청춘과 세월을 희생한 외화벌이로 국위선양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출항 때 까지 다시 그 주점을 찾지 않았다. 노래 외에는 별다른 기억도, 속을 터놓은 대화도 없었지만, 왠지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 버린 사람에 대한 거부감같이, 원인모를 불편한 감정이 두려웠기에.

 

뷔페, 식탁의 하이에나들

출항을 앞두고 선내소독과 병행한 마지막 휴일, 야유회 삼아 나체촌 탐방에 이어 때를 놓쳐 한참 늦어버린 점심 겸 저녁식사를 위해 대리점에서 서둘러 예약한 뷔페를 찾았다.

뷔페는 바이킹들에게서 유래됐다는 말이 있다. 오랜 해상생활 후 고향에 돌아오면, 각자 자신 있는 음식들을 장만해 한데 모여앉아 이것저것 맛보는 모양새였으리라.

당시 우리에겐 그저 들어만 보았을 뿐 생소했던 식당형태였다. 술값은 따로 계산하되 모든 음식을 양대로 퍼먹어도 아무런 제재가 없다는 설명에 모두가 환호를 내질렀다. 현지 손님들이 박수를 치며 전의를 불태우는 우리를 보고 뭔가 꺼림칙한지 죄다 발길을 돌리는 바람에 전용으로 대절한 꼴이 되어버렸다. 연회장 같은 뷔페로 들어서자 잔치 상처럼 차려진 수 십 가지 음식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라, 여기도 밥이 있네.”

먼저 해물과 고기를 얹은 볶음밥인 빠에야(Paella)가 눈길을 끌었다. 뻣뻣한 식감의 쌀이라도 고추나 양파 피클을 곁들이자 그런대로 괜찮은 메인디쉬가 됐다. 오징어 먹물에 적신 아로즈네그로(검은 쌀밥의 의미)와 느끼함을 잡아 줄 매운 타바스코(Tabasco) 소스까지 찾아냈다. 야채샐러드와 엠파나다(튀김만두), 바케트 빵 사이에 끼울 짭짤한 하몽(염장 돼지다리)부터 토마토 살사(소스)를 얹은 스파게티. 새우와 굴 같은 각종 해산물과 로모(등심), 아사도(갈비)에 초리수(반건조 소시지)며 숯불구이 스테이크가 즐비했다. 후식으로 갖가지 열대과일에 달콤한 엘라도(아이스크림), 앙증맞은 작은 사이즈 병에 담긴 시원한 음료들.

김치에 된장국 아니면 밥도 못 먹는다는 나이든 선원들도 허기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기회임을 상기시키는 갑판장의 독려까지 선원들의 전의에 불을 지폈다.

“공동경비처리가 아니고 그동안 욕봤다고 본사에서 한 턱 내는 거란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시는데 못 먹는 게 손해고 아끼면 똥 된다. 원래 먹는 데는 흉이 없다. 촌놈들이 언제 이런 것들 다시 먹어 보겠노. 오늘 모두 양놈 음식 배 터지게 먹고 죽어봐라.”

음식들을 퍼 나르고 익숙하지 못한 포크와 나이프질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전투를 방불케 하는 맹렬한 식사였다. 각기 비워 낸 접시의 숫자를 자랑하며 시합을 하듯 먹어댔다. 푸드파이터들이 따로 없었다. 빈 맥주병과 와인 병은 계산하기 쉬우라는 배려로 아예 구석진 테이블을 집결장소로 정했다.

짬짬이 짧은 단체 휴식으로 컨디션 조절까지 해가며 바이킹들의 승전파티 같이 질펀한 식사는 두 시간 넘게 계속됐다.

화장실에 다녀온 누군가가 물벼락을 뒤집어쓴 채, 손을 씻는데 대야에서 물이 분수처럼 솟아오른다며 껄껄 웃었다. 촌놈들이 평생에 듣도 보도 못한 비데였다. 지금처럼 변기에 분사기능이 장착된 것이 아니라 따로 설치된 도기항아리밑바닥에 부착된 수도꼭지 형태였다.

눈치코치로 때려잡아 용도를 짐작이라도 했던 그나마 좀 깬 인간들은 수압이 너무 세 밑구멍이 찢어지겠다는 우스개를 했고, 솟구치는 물줄기에 얼굴을 들이대고 세수를 했다는 자백(?)들이 줄을 이었다.

후식은 더욱 점입가경이다. 아이스크림을 축구공 만하게 접시에 퍼 담아 올렸다. 바나나 한 다발, 메론 열 조각을 다 먹어 조지는 선원에다 소화제 대용이라며 콜라 두 세병은 기본으로 입가심을 했다. 포장된 각설탕과 초콜릿 몇 개 정도는 벌써 주머니에 슬쩍 집어넣은 후였다. 맥주와 와인에 음료수 빈병들은 두 테이블에 걸쳐 웅장한 산을 이루고 있었다. 카운터의 세뇨라(아줌마)가 눈이 휘둥그레져 뒤로 넘어갈 판이었다.

그날 불행히도 굶주린 하이에나 떼 같은 40여 명 한국선원들을 한꺼번에 손님으로 모신 그 뷔페는, 전쟁 후의 폐허를 연상 시키는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배고프고 가난한 뱃놈들이 대서양 항구도시에서 저질렀던, 다소 모양이 빠지는 흑역사 한 토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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