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㉔ 흥청대던 항구,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㉔ 흥청대던 항구,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 현대해양 기자
  • 승인 2020.02.11 1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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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 나로도항

나로도항을 들렸다 거문도로 가는 쾌속선

나로도는 내나로도와 외나로도 두 개의 큰 섬을 말한다. 주민들은 나로도보다는 ‘나라도’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국마를 키우는 나라의 섬이라 해서 ‘나라 섬’이 국도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도양목장에 속하는 속장으로 제주도에서 종마를 들여와 방목하였다. 조선 세종 때 ‘고초 도조약’으로 쓰시마 어민들이 나로도 바다를 드나들며 조업을 했다. 《한국수산지》에도 國島라고 표기하고 각각 내국도와 외국도라 기록했다. 나로도항은 전라남도 고흥군 봉래면 신금리에 있다. 연안항으로 축정항이라고도 하며, 밖으로 애도와 사양도가 파도와 바람을 막아주는 천연양항이다. 여수와 거문도를 오가는 쾌속선이 거치는 중간기착지이다.

나로도항에서 출어를 준비하는 어선
나로도항에서 출어를 준비하는 어선

 

조선에서 세토내해를 꿈꾸다

나로도항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출어어업과 이주어촌을 통한 우리바다 자원의 수탈을 잘 보여주는 어항이다. 내나로도를 지나 외나로도에 접어들어 신금마을에서 나로우주센터로 가기 전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그곳에는 축정(築亭)이라는 이름도 마을도 없었다. 조선인들이 살던 마을에서 떨어진 바닷가를 매립하고 항만을 축조해 붙인 이름이다. 그 전에는 ‘치끝’이라 불리는 바위해안이었다. 그곳 바위를 깨뜨리고 주변에서 돌과 흙을 가져다 매립해 정착지를 마련했다. 나로도 주변 바다로 진출한 일본 어민들은 세토내해 주변 지역어민들이 많았다. 바다도 비슷하지만 주요 어족자원도 유사했다. 초기에는 후쿠오카 출신이나 조선어장에 진출했지만 이후 히로시마, 후쿠야마, 오카야마, 다카마쓰 등 세토내해 어민들이 들어왔다. 이곳은 어장이 좁아 기존의 어장질서 관행을 비집고 새로운 어장을 개척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어족자원들 감소하면서 조선바다로 눈을 돌렸다. 일본 어민들 중에는 나로도를 키타노야마세토(北山の 瀨戶)내라고 기억하기도 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우리바다의 어업을 단순한 출가어업에서 이주어업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우리 영해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어업법’을 제정했다. 조일통상장정으로 충청도 이북의 서해안을 제외하고 어로권을 획득한 일본의 어민들은 근거지를 일본에 두고 우리 영해에서 어업을 하는 것을 출가어업이라 한다. 일본에 비해 수산자원이 풍부하고 개발조건이 좋았다. 또 일본의 수산자원의 고갈과 전쟁으로 인한 수요의 증가 등도 이유였다. 이에 일본은 보조금 교부와 어장조사 그리고 어업법을 통한 제도적 지원을 통해 적극 출가어업을 넘어서 이주어업을 추진했다. 그 중 하나가 나로도항의 이주어촌이다. 당시 나로도 해역은 새우, 갯장어, 삼치 어장이 형성되었다. 이 중에서 일본 출어어민들이 주로 잡았던 것은 삼치와 갯장어였다.

통발 어구
통발 어구

 

일본인 유곽에서 납골당까지

나로도 이주어촌은 1906년 오카야마현 이주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906년 오카야마현은 보조금을 지급하며 이주자를 모집하여 지원했다. 치끝이라 부르던 곳에 정주마을을 만들고 창포는 갯장어와 삼치의 성어기에 임시 유곽이 들어섰다.

《한국수산지》(1910)에 따르면, 나로도는 203호 848명(내나로도 105가구 450명, 외나로도 98호 398명)이 거주했다. 당시 나로도에 들어온 일본인은 모두 19호에 71명이며, 이들 중 어업을 하는 사람은 8호 35명으로 모두 오카야마 현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이주어촌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로도에 정주한 일본인 외에 갯장어와 삼치 성어기때 들어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많은 배가 들어올 때는 140-150여 척의 어선과 운반선이 들어 양포(외나로도 북동쪽 끝, 지금의 창포마을)에 머물고 일부는 무구미(외나로도 서쪽 끝, 지금의 엄남마을 부근 추정)에 자리를 잡았다. 특히 창포에는 잡화점, 요리점, 음식점 등 18호에 220명이 들어와 임시건물을 짓고 영업을 했으며 매춘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143명이나 되었다. 당시 나로도의 갯장어, 삼치, 잔새우가 주된 어획물이었다. 갯장어는 주낙을, 삼치는 유망을 새우는 조선인은 궁선을 사용했지만 일본인은 조망과 안강망으로 조업을 했다. 이외에도 조기, 갈치, 농어, 감성돔을 어살이나 외줄낚시로 잡았다. 1929년말 외나로도에만 일본인은 83호에 380명으로 증가했다. 당시 조선인이 215호에 1,249명으로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다. 1936년에는 신금리에 ‘나라도어민훈련소’가 세워졌다.

축정에 조성된 이주어촌의 중심거리를 본정통이라 했다. 신금마을에서 나로도항으로 들어오는 옛길이다. 이곳에 우체국, 금융조합, 심상소학교, 수원지 등 시설이 있었다. 지금도 나로도 우체국은 계단과 건물 일부와 골목의 흔적처럼 남아 있다. 골목에서 나와 해안으로 꺾어지는 곳에 어업조합(1923년 결성), 선구점, 상점 등 유흥가가 형성되었다. 지금 해안과 접한 식당과 가게의 뒷골목이다. 그 위쪽으로 신사와 공회당이 있었다. 엄남마을로 가는 남쪽 해안에 조선소와 새우제조공장도 자리를 잡았고 조상을 모시는 납골당과 화장터도 있었다. 이들은 단순하게 어업을 위해 잠시 이주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이주했던 것이다.

신사로 올라가는 골목
신사로 올라가는 골목

내가 안강망 귀신이여

해방되자 일본인들은 군함과 운반선을 타고 축정을 떠났다. 그리고 건물과 시설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일본인 밑에 일을 하던 운 좋은 사람들이 차지했다. 한국전쟁이 후 나로도항은 어청도, 흑산도, 청산도, 성산포, 거문도 등 11개의 항과 함께 1965년 어업전진기지가 되었다. 예전만은 못하지만 여전히 삼치와 새우 그리고 갯장어가 주요 어획물이었다. 특히 10월 한 달은 나로도항이 흥청댔다. 삼치철이면 ‘나로도로 돈이 다 몰린다’는 말이 돌았다. 나로도 학생들은 ‘교복단추를 금으로 한다’고 소문도 났다. 무엇보다 전라북도 위도와 함께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삼치파시가 형성되어 하루에 500여 척이 조업을 하는 곳으로 1970년 연안항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남획인지 수온인지 알 수 없었지만 삼치가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에 그 자리를 지켜 준 것은 새우였다. 나로도항을 찾던 어선들이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하루 100여 척씩 드나들던 배들이 10여 척으로 감소했다. 연근해 어장이 고갈로 되자 큰 배를 준비해 먼 바다로 나갔다. 수산물 유통도 산지의 어항에서 소비 중심지인 도시 항구로 옮겨졌다. 나로도항을 이용하던 배들도 육상소비지와 가까운 여수항, 목포항, 심지어는 부산항을 이용했다. 나로도항에 선적을 둔 선주들도 대도시 인근 항에서 위판을 하고 출어준비까지 마친 후 잠깐 나로도항에 들릴 뿐이다.

축정마을에서 만났던 김 노인은 “우리들이 안강망 구신 59년생이여. 목포 여수 여기도 많았어. 인천도 많았고. 동지나 남지나 제주에서 열 몇 시간 두들기고 나가. 바다하고 하늘하고 갈매기들이나 보고, 노상 잡는 것은 갈치제”라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열일곱에 안강망 배를 타기 시작했다. 그때 고흥에서 제일 부자마을은 축정마을이 아니라 맞은 편 애도였다. 지금은 20명도 되지 않는 작은 섬이지만 집집마다 안강망배가 있었다. 외지에서 배를 타려고 들어온 사람으로 수백 명이 머물러 북적거렸다. 나로도항에 다방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당시 20대의 축정마을의 건장한 주민들 중 안강망 배를 타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김 노인도 그 중에 하나였다. 당시 20대의 피 끓는 청년이었다. 지금은 육순을 지나 칠순에 이른 사람들이다. 빚을 내서 큰 배를 지어 갈치잡이에 나선 사람들도 있었다. 갈치는 잡히지 않고 불법어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한 때 잘나갔던 많은 선주들이 백수가 되었다. 배운 것은 배 부리는 일이라 ‘고대구리배(소형기선저인망)’로 바꿨다. 그 저인망배가 나로도항의 비린내를 30여 년 동안 지켜주었다. 하지만 이것도 어업자원 보호와 불법어업 근절을 위해 ‘싹쓸이 어업’의 주범으로 낙인찍히면서 그만 두어야 했다. 보상을 해주었지만 손에 들어오기 전에 빚잔치가 되고 말았다. 나이는 들었지만 새우잡이라도 해볼까 하고 조망배를 구입했지만 한중·한일 어업협정으로 연안으로 몰려드는 어선들이 늘어 기름 값도 어려웠다. 어판장 옆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에 앉아 햇볕바라기를 하는 젊은 노인들이 모두 안강망 귀신들이다.

일제강점기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알려진 봉래산 편백나무 숲
일제강점기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알려진 봉래산 편백나무 숲

지속가능한 어촌은?

나로도항은 과거처럼 흥청대지는 않지만 맛을 아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먹을거리만 아니라 최근 여행객들의 발길도 늘고 있다. 나로도항 근처에 가볼만한 곳으로 전라남도 민간정원 1호 ‘쑥섬’을 권한다. 나로도항에서 배로 5분도 걸리지 않는다. 또 가볼 만한 곳으로는 봉래산 편백숲이다. 삼나무와 함께 편백나무는 일제강점기에 심어졌다. 봄철이면 복수초 군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봉래산 정상에는 봉화대가 있고 다도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나로도 서쪽에 위치한 고흥군 도화면의 금강죽봉이나 활개바위 등 기암괴석도 애도와 함께 최근 고흥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여행지이다. 겨울바다를 보고 싶다면 고흥의 나로도를 권한다. 동해의 명징한 바다와 서해의 차가운 갯벌의 속살 그리고 남해의 다도해를 모두 읽을 수 있는 곳이다.

나로도항에서 본 쑥섬
나로도항에서 본 쑥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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