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 개척사> 제1부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 ②
<오대양 개척사> 제1부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 ②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09.05.19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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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작가 천금성의 기획다큐멘터리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전에 한 가지 양해를 얻고자 합니다. 장기연재가 될 이 기획물은 우리 대한민국의 해양력(海洋力)이 오늘 날처럼 세계적 수준으로 증대되기까지 그 초석(礎石)이 된 우리 선인(先人)들의 피나는 개척정신과 빛나는 업적을 사실(史實)에 근거하여 제 1부 한국 원양어업, 2부 한국 조선업, 3부 한국 해운업 등으로 전개해 나가도록 하되, 가능하다면 현존(現存)하는 관련자들의 직접적인 증언(證言)을 수용함으로써 기록(記錄)으로서의 가치를 드높이자는 게 필자의 의도입니다. 그러나 몇몇 등장인물의 경우 그들의 행적(行蹟)에 본의 아닌 시행착오(施行錯誤)나 실책(失策)이 없지 않았을 것이므로, 이와 관련하여 간혹 당사자에게 누(累)를 끼치게 되는 본의 아닌 묘사(描寫)나 표현이 개입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점 독자들께서는 부디 너그러이 용인(容認)해 주셨으면 합니다.    <필자>

 

 

  05

 부산을 출항한 지남 호는 대마도 북단을 지나 다음 날 아침 일본 시모노세키(下關) 항에 입항했다. 아직도 현해탄을 반쪽으로 갈라낸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이 엄연하였으나, 시모노세키는 예로부터 조선업을 비롯한 수산물 가공업이 활발하여 원양으로 출어하는 배들의 기지(基地)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온 만큼 지남 호의 기항에는 별다른 문제가 야기되지 않았다. 그곳에서 지남 호는 지난 8년의 세월 동안 흰 코끼리 신세를 겪느라 녹슬고 망가진 갖가지 어로 도구를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어구와 선용품도 보충한 다음 다시 타이완의 가오슝(高雄) 항에 기항한 것은 부산을 떠난 지 어언 10여 일이나 지나서였다.  시모노세키 기항은 그렇다 치더라도, 가오슝 기항은 선주인 심상준 사장 입장에서 보면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장도에 오르기에 앞서 지남 호가 당초 설정한 어획목표는 2개월의 조업으로 대략 200M/T 이상의 투너를 잡아 올려 15만 달러의 어획고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 같은 목표는 전적으로 미국 어선에서 오랫동안 선장을 역임하였고 한국에 와서는 수산시험장의 기술고문을 맡아 온, 투너 조업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모르건 기술고문이 내놓은 데이터에 근거하여 나온 것인 만큼 그 말을 들은 심 사장의 기분은 하늘을 찌를 듯 용기백배한 것도 사실이었다. 모르건의 말대로 그렇게만 된다면 그거야말로 배를 정부로부터 불하받을 때 지불한 선가(船價)의 절반을 하루아침에 뽑아낼 수 있는 노다지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직 한 번도 낚시를 던져 넣었다는 소식도 없는 채로 벌써 20여 일이나 날짜를 까먹고 있으니 속이 탈 건 불문가지였다. 더욱이 타이완의 가오슝 항은 향후 지남 호의 주어장이 ‘타이완 동쪽 해상(남지나해)’으로 예정되어 있는 만큼 어획만 순조롭다면 당분간 기지로 활용할 계획으로 있어서 우선 항구 사정부터 알아보자는 게 기항 목적이었다고 하니 심 사장으로서는 속이 불편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7월 18일, 지남 호는 드디어 가오슝 항에서 불과 하루거리인 남지나해 어귀에서 아직도 해가 뜨기 전인 새벽 무렵부터 투승작업을 시작했다. 작업은 전적으로 모르건 고문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다. 어부들 가운데는 예전에 연안 어장에서 상어 주낙을 해본 경험자가 몇 명 있었으므로 주낙을 깔아나가는 일은 그럭저럭 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어장 선택은 전적으로 모르건 고문의 오랜 경험과 판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서 그것을 지켜보는 간부들의 마음은 초조하기만 했다. 
 “내가 알기로 바로 이 곳에 투너 군(群)이 한 번씩 회유해 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고 투승에 앞서 모르건 고문이 빙 둘러선 간부들을 향해 운을 뗐다. 

 모르건 고문의 말에 단장인 남상규 해무청 어로과장과 지도관 이제호 수산시험장 어로과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르건의 그 말은 전적으로 어떤 근거도 갖지 못한, 그저 기대에만 부풀은 엉터리 예측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르건 선장은 미국 동부 해안의 대서양 어장에서 ‘꼬마 선망(旋網)’을 한 경험이 전부였고, 지금 지남 호가 하고자 하는 연승식(延繩式) 어법으로 생판 환경이 다른 남중국해에서의 조업은 그게 비로소 처음이니 말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날의 조업은 완전한 실패였다. 그 날 지남 호는 당초 보유하고 있던 총 400바스켓(한 바스켓에는 3~40미터 간격으로 여섯 개의 낚시가 매달려 1백 길 물속으로 침하한다) 가운데 절반도 안 되는 150바스켓을 대략 6~7마일 거리(육지의 30리에 해당)에 걸쳐 길게 깔아두었으나 정작 양승을 해보니 투너는커녕 상어 새끼 한 마리 올라오지 않았던 것이다. 

 모르건 고문은 죽을 맛이었다. 모든 고기잡이가 마찬가지지만, 특히 연승조업에서 투승(投繩) 못지않게 양승(揚繩 ; 주낙 거둬올리기) 작업이 그 위험성이나 난이도 면에서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없이는 초짜배기에 진배없는 한국인 어부들만으로 쉽사리 처리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처음 몇 바스켓을 감아올릴 동안 레버를 잡는 등으로 갑판에 머물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해가 기울 무렵이 되어도 전혀 낌새가 엿보이지 않자 그만 슬그머니 침실로 들어가서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새벽에 투승작업을 시범해 보이다가 갑자기 허리를 삐끗하여 지금 운신하기도 어려울 만큼 고통이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당황한 것은 간부들이었다. 특히 부산수대 어로학과를 나와 어업지도선인 <YMS 200> 호를 타고 있던 중 지남 호로 옮긴 윤정구 선장은 눈앞이 더욱 캄캄했다. 파평(坡平) 윤씨 양반 후손으로 세상의 무슨 고관백작(高官伯爵) 감투를 씌우더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려한 풍모(風貌)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험난한 역정의 뱃사람이 되기로 작정하고 지금 자신이 맡고 있는 이 배가 미구 어느 날 남태평양으로 출어하게 된다면 그 때는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 선장’이 되겠다는 기대와 희망으로 오늘에 이르렀는데, 유일한 경험자가 드러눕는 형편이 되고 말았으니 앞으로의 일이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이냐는 걱정인 것이었다. 

 어찌 되었건 시험조업은 다음 날인 19일, 날이 환하게 밝아서야 겨우 끝을 냈다. 숙련된 어부들이라면 반나절이면 충분히 끝낼 수 있는 일이었으나 처음 겪는 일이라 그처럼 늦어졌던 것이다. 낚시에는 물론 단 한 마리의 고기도 걸려 있지 않았다.


 
 06 

 양승작업을 마친 어부들은 브리지 눈치만 살폈다. 배를 띄워 놓은 채 브리지에서는 남 단장을 비롯한 이 지도관과 윤 선장이 머리를 맞대고 숙의에 숙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결론은 무엇보다도 모르건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통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무슨 무거운 물건을 들다가 그런 것도 아니고, 갑판에서 넘어지는 불상사 같은 것도 없었는데 식음까지 전폐한 모르건은 다음 날 혼자 화장실을 가기도 어려울 만큼 완전 식물인간이 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옛날 미국선 선장을 할 당시부터 좋지 않았던 허리가 이번에 도진 것이라 했다. 

 그렇게 지남 호는 꼬박 하루를 물에 떠 있었다. 남 단장은 모르건이 금방 죽을 지경은 아니므로 ‘우리들끼리’ 다시 한 번 더 조업을 해보자고 제의했다. 하지만 수산시험장에서 어로과장을 한 이 지도관은 난색을 표했다. 명색이 어로과장을 했다는 사람이 어장 데이터조차 갖고 있지 못 했던 그로서는 모르건도 찾아내지 못한 고기 떼를 어디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가 걱정이었던 것이다. 

 결국 내린 결론은 우선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는 쪽으로 모아졌고, 곧 선수를 다시 가오슝 항으로 돌렸다. 모르건은 곧 병원으로 실려 갔다. 지남 호는 거기서 이틀을 더 머물렀다. 병원으로 달려간 간부들은 의사로부터 ‘병이 위중하니 절대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말만 들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 동안 선주인 심상준 사장은 부산에서 아주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투자금도 만만치 않은데다가 출항하고 20일이 지나서도 고기 한 마리 잡기는커녕 환자가 생겼다며 부지런히 항구만 들락이고 있다는 전문을 접한 때문이었다. 이러다가는 완전 알거지가 되고 말겠다는 난감함으로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본선 부득이 모르건 씨를 귀국시키기로 하였슴. 그러나 우리 힘으로 최선을 다하여 기대에 부응토록 하겠으니 안심하시기 바람.> 그런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그렇게 하여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 장군에 이어 미국인으로서는 두 번째가 될 동상(銅像) 설립예정자는 영원히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심 사장으로서는 조업을 포기하고 부산으로 되돌아오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은 것만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디든 어장은 분명 있을 것이니 전 선원 힘을 합쳐 좋은 결과를 얻어내시기 바랍니다. >
  그렇게 격려할 수밖에 없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빈 배로는 귀국하지 말라는 간곡한 당부이기도 했다. 선주의 그 말을 거역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기일전(心機一轉), 지남 호는 7월 24일 다시 가오슝 항을 뒤로했다. 이번에는 선수를 아예 남쪽으로 돌렸다. 남지나해 인근이나 필리핀 근해는 아무래도 어장 형성이 안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이틀을 달린 후 지남 호는 드디어 독자적으로 투승을 결행했다. 배는 아열대 해역을 벗어나 이제는 북위 15도선의 열대 해역에 도달했다. 달리면서 보니까 날치란 놈들이 배가 일으키는 물결에 놀랐는지, 바닷물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라서는 꽁지를 흔들며 멀리 도망치고 있는 게 보였다. 한여름 철이면 제주도 인근에서도 흔히 보던 놈들인데, 몸치가 배는 더 되는 큰놈들이었다.
  “여기서 한 번 해봅시다.”
  부근에는 섬도 없는 망망대해였다. 

 그리고 선원들은 모르건이 딱 한 차례 시범을 보인 방식대로 주낙을 깔기 시작했다. 도입 당시 지남 호는 트롤이나 선망 등 갖가지 조업 방식을 구사할 기능을 갖고 있었으나, 투너잡이는 오로지 연승식이라야 가능하다는 모르건의 말만 믿었던 탓이었다. 모르건은 원래 미국 선망어선(旋網漁船)의 선장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그 판단이 틀리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선망식 조업을 하려면 스키퍼(Skipper)와 네트보트(Net boat)에 스피드보트(Speed boat) 등 대여섯 척의 보조선이 있어야 어군몰이가 가능하고, 거기에 어군탐지용 헬리콥터까지 동원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만큼, 한 척뿐인 지남 호로서는 오로지 연승식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네댓 기간이 걸려 겨우 주낙을 100바스켓 가량 깔았다. 그 동안 윤 선장은 조타실 한 귀퉁이에서 용왕님에게 제발 고기가 걸려들라고 두 손 모아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결과는 10kg이나 될까한 상어 두 마리 말고는 모르건 때와 똑같았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놈의 투너라는 고기를 단 한 마리라도 잡고 나서 죽든지 말든지 하자는 사생결단(死生決斷)의 오기가 솟아났다.

  배는 다시 남행을 계속했다. 그 동안 배는 이틀 가고 한 번 투승하고, 사흘 가고 한 번 투승하는 식으로 남하를 계속하여 위도 상으로 중국의 하이난다위(海南島)도 지나고, 옛날부터 중국이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해 온 산호초인 난사군도(南沙群島)도 지나쳐 이제는 하루 이틀이면 싱가포르 해협을 목전에 둘 판이었다.
  “여기서 또 한 번 더 해봅시다.”
  속이 타기는 남 단장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명색이 한국 수산업의 최고 행정가인 해무청 어로과장이 투너 한 마리 잡지 못 하고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더 이상 우스개가 어디 있을 것인가.
  “그러시지요.”
  목소리가 잦아들기는 이제호 지도관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은 동서양을 잇는 국제 해상로(海上路)의 요충지여서 오르내리는 화물선도 때때로 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날의 결과 역시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길 잃은 상어 새끼 한 마리 걸려들지 않았던 것이다. 

 간부들이 다시 살롱에 모였다. 숙연했고, 웃음을 잃은 지 한 달도 더 되었다. 그런데 동석한 기관장이 또 간 떨어지는 소리를 했다. 연료가 바닥나기 직전이라는 것이다. 원래 워싱턴 호가 연료를 가득 채우면 최소한 석 달은 마음껏 기동할 수 있게 설계되었으나, 출항 당시 겨우 3분의 1정도만 수급(需給)한 결과였다. 더욱이 첫 기항지인 시모노세키에서도 추가적인 연료보급을 받지 않았던가. 참으로 남세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나 남았소?”
  윤 선장이 물었다.
  “딸딸 긁으면 한 이틀은 돌릴 수 있을 겁니다.”
  윤 선장은 해도를 살폈다. 가장 가까운 항구라야 꼭 이틀거리의 싱가포르가 눈에 들어왔다.
  - 본선 유류수급 차 싱가포르 입항코자 하니 수배 바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대로 표류선(漂流船) 신세로 전락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07 

 기름이 떨어졌다는 보고를 받은 심 사장은 백방으로 연줄을 찾아 나섰다. 원양개척이라는 원대한 기대와 포부로 먼저 제동산업이라는 수산회사부터 설립한 상황이었지만, 아직도 회사 체계가 잡히지 않아 세계 어느 곳에도 에이전트(代理店) 등의 거래선(去來先)은 한 곳도 확보하지 못한 처지였다.

 더욱이 원양항해를 하는 동안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를 상황에서 당연히 예비해 두었어야 할 비상선용금(非常船用金)조차 한 푼도 갖고 있지 못 했다. 심 사장이 그처럼 완벽한 출항준비를 하지 못한 것은 자금 문제도 있었지만, 어장으로 나가기만 하면 어떻든 고기는 잡아낼 게 틀림없으므로, 향후 잡다한 경비가 필요하더라도 그 고기를 팔면 얼마든지 해결이 될 것이라고 탄탄 믿은 결과였다. 그런데 어창이 텅텅 비어 있으니 이를 어쩔 것인가. 

 그런데 구세주(救世主)가 나타났다. 심 사장이 상공부에 확인해본 결과 다행히도 군정 당시 상공부에서 상무부장(商務部長)을 지낸 오정수(吳禎洙)라는 사람이 싱가포르에서 대한무역진흥공사(大韓貿易振興會社)를 설립해 놓고 고무신 원료인 생고무를 수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 사장은 오래 전부터 간장공장으로는 국내에서 제법 명망 높은 몽고간장을 경영해 온 덕분에 상공부에 관료로 재임한 오 사장과는 다소 안면이 있었다. 그래서 거두절미하고 오 사장에게 사정이 여차저차하니 돈을 좀 꾸어 달라고 통사정했다. 그렇게 빌린 돈이 7,000여 싱가포르 달러(US 3,500달러)였다. 그 돈 중에서 1,500달러로는 우선 기름부터 채우고(그 양으로는 채 20일도 견디지 못 한다), 나머지는 선원들 병원비와 식량구입 및 기타 선용품을 사는 데 사용했다.

 그렇게 재충전을 완료한 지남 호가 다시 싱가포르를 출항한 것은 달이 두 번이나 바뀐 8월 11일의 일이었다. 지남 호가 부산을 떠난 것은 6월 29일의 일이었고, 그리고 두 달간의 조업을 마치면 귀국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았던 만큼 귀국하기까지 열흘의 항해기간을 뺀다면 앞으로 남은 조업기간이라야 겨우 열흘 남짓한 판이었다. 그러니 남 단장을 포함한 세 명 간부들은 영판 ‘죽을상’이 될 수밖에는 없게 되었다.
  막상 싱가포르 항을 뒤로하였지만, 아직도 지남 호의 침로는 결정되지 않았다.

  “자,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윤정구 선장이 물었다. 목적지가 정해지면 침로는 선장이 정하는 것이지만, 이제는 해무청 과장이자 시험조사선 단장이 최고 책임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남태평양에서는 일본 배들이 투너를 무진장 잡고 있겠죠?”
  그렇게 물은 것은 이제호 지도관이었다.
  “그럼 남태평양으로 가자는 말입니까?”
  남 단장이 버럭 역정을 냈다. 도대체 싱가포르 어귀에서 남태평양까지 거리가 얼마냐는 것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남지나해가 아닌 태평양 쪽으로 침로를 잡았다면 상황은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굳이 사모아가 아니더라도, 미크로네시아 섬들이 즐비한 서부 태평양에는 오늘날까지 수십 척의 대형 선망선들이 스쿨피쉬(School Fish)를 대상으로 매년 수십만 톤의 어획량을 올릴 만큼 세계적인 어장으로 이름난 곳이기 때문이었다. 허리를 다쳐 초장부터 하선해버린 모르건의 실수라면 바로 그 대목이었다.
  “아, 아이구우, 그게 아니고, 하도 그럴 듯한 묘책이 없어서입니다.”
  그러자 한참 해도를 들여다보고 있던 윤 선장이 입을 열었다.
  “제 생각으로는 차제에 말라카 해협을 빠져나가 인도양으로 갔으면 하는데요…….”
  “인도양요? 아이구, 거기가 어디라고!”
  남 단장의 비명이었다. 역사적인 출항식전에서 그는 ‘우리는 항해거리만 해도 왕복 5,000마일에 이르는 적도 해역으로 갑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상 최초로 시도되는 시험조업인 만큼 불타는 사명감으로 도전하여 큰 성과를 거두고 돌아오겠습니다’라고 기자들에게 호언하였던 당시의 기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허탕 친 남지나해를 다시 북상하며 주낙을 깔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인도양으로 가보자는 겁니다. 설마 어느 곳에서든 그놈의 투넌가 뭔가 하는 고기가 없을까요?”
  윤 선장의 주장에 두 간부는 못 이긴 체 동의했다. 그리고 배는 새로이 말레이시아 반도와 수마트라 섬 사이의 말라카 해협을 서북쪽으로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나흘 후인 8월 15일(하필이면 해방된 지 1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지남 호는 운명의 바다인 안다만 해(1987년 마유미에 의해 KAL 858기가 공중 폭파된 해역)의 남쪽 바다인 니코바르 제도 인근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정확한 위치는 동경 94도 29분, 북위 7도 48분이었고, 니코바르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이자 제법 높은 구릉성(丘陵性)인 <그레이트 니코바르>의 산자락을 빤히 바라볼 수 있는 곳에서였다. 그 날은 마침 바람도 미풍으로 그치고 있었고, 따라서 바다는 더없이 잔잔했다. 

 마악 여명이 트려는 새벽 다섯 시, 드디어 윤 선장의 투승지시가 내려졌다. 그 날만큼은 어부들의 각오도 대단했고, 지금까지는 비록 허탕을 치기는 하였으나 몇 번의 조업 요령도 터득한 만큼 낚시도 더 많이 담그고 보자는 욕심에서 처음으로 200바스켓(낚시 개수 총 1,200개)을 길게 깔았다. 낚시에는 일본서 실은 냉동 꽁치가 미끼로 꿰어져 있었는데, 만약 이곳에 투너란 놈들이 놀고만 있다면 꼼짝없이 걸려들게 되어 있었다. 

 정오 무렵 드디어 양승작업이 시작되었는데, 남지나해에서와 마찬가지로 50바스켓(낚시 300개)가량을 감아 올렸는데도 빈 낚시만 탈탈 올라왔다. 상갑판에서 이를 지켜보던 간부들은 실망한 나머지 차례로 침실로 도망을 쳤고, 처음 인도양 어장을 제의한 윤 선장 혼자서만 길게 내뻗은 부이를 따라 키를 잡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면 사표 내는 일만 남았군.”
  혼잣소리로 중얼거리는 남 단장은 자못 사색(死色)이었다.
  “그건 제가 할 소립니다.”
  이 지도관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입이 무거운 파평 윤씨 후손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들 점심도 건너뛴 채였다. 배에서는 연방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도무지 입맛이 당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오후 네 시경이었다.
  “으이크!”
  멋모르고 브랜치라인(Branch Line; 낚시가 매달린 가짓줄)을 넘겨받은 한 어부가 소리쳤다. 지금까지는 빈 낚시만 흐느적거렸는데, 갑자기 브랜치라인이 아주 탱탱하게 긴장되면서 연신 물방울을 튕겨내고 있는 것이었다.
  “야, 조심해! 뭐가 걸린 거야!”
  연안어장에서 상어주낙을 제법 다루어 본 갑판장이 소리치며 날렵하게 그 줄을 다시 넘겨받았다.
  갑판장이 조심조심 줄을 끌어당기자 갑자기 저만치서 바닷물을 박차고 길고 뾰족한 막대 같은 것이 쓕! 하고 솟아올랐다. 흡사 북극해에 흔하다던 <일각고래>의 뿔 같았다. 어부들은 물론 윤 선장마저도 난생 처음 보는 괴상한 물고기였다. 

 “뿔고기다!”
  하고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 소란에 두 간부가 상갑판으로 뛰어나왔다.
  “조심해! 놓치면 안 돼! 그게 투너라는 고기다!”
  남 단장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하지만 그 괴상한 물고기는 남 단장의 말과는 달리, 결단코 지금까지 몽매에도 그리던 <투너>가 아니었다. 본지 지난 호(4월호)에 실린, 이승만 대통령이 나란히 서서 찍은 거대한 물고기가 바로 그 주인공으로, <투너>가 아닌 <흑새치(Black Marline)>라는 원양 회유선 고기였던 것이다. (사진에서는 앞서 말한 주둥이뿔이 잘려 있는데, 1m에 달하는 주둥이뿔을 합치면 체장은 3m가 넘고, 중량은 150kg 남짓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물고기는 지금도 원양어선들의 주 포획 대상어류다) 

 바로 그 물고기가 한국 수산업 사상 최초로 잡아 올린 원양어류(遠洋魚類)였으며, 그리고 그 물고기를 잡은 날이 하필이면 일제 식민지 신세로부터 벗어난 광복 12주년이 되는 경축일(慶祝日)이었다. 
 그런 다음 자잘한 몇 마리의 잡어가 올라왔는데, 그 날의 총 어획량은 앞서의 흑새치를 합쳐 500kg(0.5M/T)이나 되었으므로 비로소 간부들을 포함한 어부들은 이제야 낯을 들고 귀국하게 되었다고 안도했던 것이다.  <다음호에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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