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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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송우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승인 2020.01.07 1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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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에서 펼쳐진 사랑 이야기

[현대해양] 1950년대 초 부산은 6. 25 동란으로 몰려온 피난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집집마다 이곳 저곳에서 피난 온 자들이 집집이 세들어 살았다. 1953년 9월 15일자 부산수산대학 학보에는 향파 선생의 「방파제」라는 제목의 꽁트에 가까운 작품이 한 편 실렸다. 전란 당시 젊은이들의 순수했던 사랑 이야기가 방파제 공간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철도국원으로 있는 아버지와 다른 식구들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고, 혼자 주인집에 남아있던 성헌이는 간신히 차표를 손에 넣자 서울로 가기 위해 짐을 싸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서울 수도가 수복되어 피난 왔던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되돌아가게 되어 성헌이란 대학생도 서울로 떠나게 되었다. 떠나기 전날 밤 성헌이가 머물었던 주인집 딸인 미야와 방파제에서 남다른 만남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올봄에 P 고녀를 졸업한 주인집 딸인 미야는 한집에서 이태 가까이를 있으면서도 별반 서로 말의 왕래가 없었던 사이였다. 그러나 이제 서로 헤어지게 된 때에 두 사람이 방파제에서 만남을 가지고 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성헌은 남포동 방파제로 나갔다. 막상 떠난다고 생각을 해보니 그래도 부산이 아쉽다.

“바람 쐬러 가세요?”

걷다가 돌아다 보는 것은 미야였다.

“네 바다가엘 나가시는구먼요.”

두 사람은 방파제 맨 끝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와글와글 사람들이 저자 같았다. 더러는 물속에 뛰어들어 기성을 치면서 헤엄을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음력으로 스무이틀 물론 달이 뜰 양이면 아직도 까맣지만 산모롱이엔 제법 붐하게 달기운이 배어 있었다.

“아아 이 바다두 오늘밤이 마지막이구료.”

두 사람은 이별의 아쉬움과 함께 평소에 나누지 못했던 젊은 감정들을 서로 나누기 시작한다.

“이번 가시면 언제 또 오세요?”

“글세 올시다. 또 6. 25같은 변괴가 다시 일어난다면 몰라두.”

“부산하고는 인연 없으신가 보죠.”

“이태씩이나 있은 게 적어서요?”

“이태가 많아요? 어쩐지.”

“어쩐지?”

큼직한 별들이 실로 꿰매 달아논 것처럼 한자리에 가만 있다가 시원한 바람이 무데기로 몰아 붙일 적이면 약간 흔들리는 듯도 했다. 여태껏 한 젊은 여성으로서 계산해 오지 않았음이 새삼스레 기이한 느낌이었다. 어찌해서 만일 이 여자와 가까이 사귀는 사이었더라면 오늘 이 밤이 얼마나 뜻있는 밤이었을까.

두 사람의 대화가 무르익어 가자, 미야는 성헌에게 어려운 부탁을 한다. 일자리를 구하기 어렸웠던 그 때로서는 참으로 힘든 부탁이었다.

“서울 가시면 취직 하나만 구해주세요.”

“취직요? 어떤 델.”

“아버님께서 철도국에 다니시질 않아요.”

“글쎄 한번 말해 볼까요?”

“꼭 좀 부탁합니다. 어려우시지만.”

“힘껏 알아는 보죠. 꼭히 될는진 몰라두.”

옆의 사람들의 코 고는 소리가 짙어갈 무렵에 두 사람은 일어섰다. 녹정쪽은 보석을 박아논 듯 불빛이 유난스레 아름다웠다. 역시 떠나려고 보니 부산은 적지 않아 아까웠다.

다음 날 아침 어두컴컴한 새에 성헌은 주인집과 하직을 하고서 정거장으로 나왔다. 나올 적에 미야가 문밖까지 따라 나오긴 했으나 엊저녁 생각해서는 그다지 친밀성이 없는 것이 다소 기대에 벗어나서 섭섭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여섯시 반의 서울행 급행열차 속에서 개찰을 기다리고 서 있는 중에 “주 선생님!”하고 미야가 소리를 쳤다. 순간 손목이라도 덥석 쥐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눈 익혀보니 옆에 낯선 젊은 친구 하나가 서 있어 그러질 못했다.

젊은 친구는 어디서 한번 본듯한 얼굴이긴 한데 갑자기 기억이 나질 않아서, 대체 이 사나이가 미야와 어떠한 사나이길래 같이 나왔을까 하고 머뭇거리는 상태였다. 그 때 미야가 “이분이 주선생, 인사 드려요”라고 인사를 시켰다. 생각을 해보니, 언젠가 영도다리에서 미야와 같이 걸어 오고 있던 사나이였다. 곧 미야는 얼마쯤 억지로인 듯 싱글싱글 웃는 낯을 지으면서, 다음 말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가 용기를 내어 한마디를 했다.

“취직은 꼭 부탁합니다. 아무데라도 좋으니까요” “저, 저 제가 아녜요.”하고 눈으로 젊은 친구를 가르치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성헌은 그 말에 슬픔을 느낀다. 그러나 “네에”하고 아무 의미없는 대답만 한다. ‘으응, 네가 연극쟁이로구나 그러나 귀여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열차 안으로 들어온 성헌은 끝내 그 젊은 친구의 얼굴이 사라지지 않았다.

대학엘 못 가면서도, 파마를 제 때에 못하면서도 자기가 믿는 사람한테 충실하려 애쓰는 미야를 위해서 뭔가는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성헌이가 부산을 떠난다는 이야기이다.

1950년대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가 먼 옛날이야기 같이 느껴진다. 전쟁의 혼란 속에 먹고 사는 일조차 힘들었던 시절이었지만, 젊은이들의 사랑은 순수함에서 크게 멀지 않게 느껴진다. 향파 선생이 젊은이들에게 전해주려는 사랑의 실체는 사랑의 갈등이 아니라, 사랑이 또 다른 사랑과 만나 승화되는 더 큰 사랑을 깨닫게 해 주려고 한 작가의 재치가 드러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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