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㉓ 바다의 귀족, 그들의 운명은?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㉓ 바다의 귀족, 그들의 운명은?
  • 김준 박사
  • 승인 2020.01.10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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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

[현대해양] 모슬포는 제주특별자치도 서남쪽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에 있는 국가어항이다. 남쪽으로 모슬포와 최남단 마라도가 위치해 있다. 마라도나 가파도로 가는 여행객들은 모슬포에서 유람선을 이용한다.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한 국가어항이자 수협 등 기반시설을 갖춘 포구다. 여름철에는 자리돔이 겨울철에는 방어가 유명하다. 물론 갈치 철에는 포구로 은빛 갈치들이 들어온다. 지난 2월에는 모슬포 위판장에 삼치로 가득찼다. 방어, 갈치, 삼치 모두 철따라 거친 바다를 가로지르는 바다의 귀족들이다.

 

최남단 제주도로 가는 포구

제주의 포구는 배만 머무는 곳이 아니다. 사람과 말도 머무는 곳이다. 그곳에 ‘산물’ 용천수가 솟기 때문이다. 물이 드는 곳에 물이 나면 한라산에서 화산암 밑으로 흐르던 물이 바닷물 솟는 곳이다. 테우 등 전통 제주배를 정박하는 곳이자, 해안마을 주민들의 식수요, 마소의 물통이기도 했다. 자리에 따라 남녀가 구분되어 목욕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런 산물의 크기, 물의 양은 곧 마을의 크기요, 마을의 힘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물이 많이 나야 많은 사람들이 모여살았을 것이고, 좋은 포구였을 것이다. 사람이 많이 모일 만큼 밭을 일구고, 어장도 개발을 했을테니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좋은 포구에는 좋은 원이 있었다. 원은 원담, 뭍에서는 독살(돌살)이라 부른다. 제주의 원에서는 멸치(멜)을 많이 잡았다. 모슬포 인근에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만든 고기잡이 돌그물 ‘ᄆᆞ술원’, 멜이 들어와 갇히는 ‘멜통’ 등이 있었다.

모슬포항 예지물에서 빨래를 하는 주민
모슬포항 예지물에서 빨래를 하는 주민

모슬포는 그 이름이 ᄆᆞ술개라는 마을에 있는 포구다. ᄆᆞ슬개는 상모리와 하모리를 이르는 옛이름이다. 포를 이르는 개는 포구이자 마을이다. ᄆᆞ슬은 모래를 뜻하는 제주말 ‘모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곳에 신령물, 신태물, 예지물이 있었다. 그 중 신태물은 도로를 만들고 도시개발을 하면서 사라졌다. 신영물도 공유수면 매립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을 마을주민과 시민단체가 지켜냈다. 대신에 교랑을 놓아 겨우 물통만 덩그러니 남고 주변은 모두 매립되었다. 신영물과 관련해 전하는 ‘오좌수’ 이야기도 있다. 1887년 봄(고종24) 일본 잠수기 14척이 가파도 주변에서 어획물을 침탈했다. 그 중 6척이 8월 모슬포로 들어와 민간의 돼지, 닭을 가축을 약탈하고 신령물 샘터에서 물을 긷는 여성들을 희롱하였다. 이에 격분한 5명의 주민이 청년들과 격투를 벌였다. 칼로 무장한 이들에게 일부 죽임을 당하고 큰 상처를 입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다섯에게는 좌수의 벼슬을 내리고 하인들에게 30냥 하사금을 내렸다. 신령물 옆에 ‘오좌수 의거비’가 세워져 있다.

예짓물은 모슬포 식당거리 맞은 편 조선소가 있는 쪽에 있다. 그곳에는 개방이라는 할망당이 있다. 그 할망이 ‘여주’인데 그 이름을 따 예지물이라 했다고 한다. 신영물은 길가에 있어 목욕을 하기 어렵지만 예지물은 한적한 곳에 있어 목욕을 하곤 했다. 이곳에는 두 개의 물통과 하나의 빨래터 등 세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마침 주민 한 분이 빨래를 하고 계셨다. 여자들이 이곳에서 빨래를 하고 있으면 남자들이 목욕을 하러 왔다가 내다 보고 그냥 가기도 한다며, 물이 들면 완전히 잠기는 물이라고 했다. 정말 다음날 그곳에 갔을 때 물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상처를 지울 수 있는 처방은 오직 ‘평화’

민간인이 희생된 섣달오름
민간인이 희생된 섣달오름

모슬포로 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허접한 표지판이 하나 있다. 마늘밭에 꽂힌 볼품 없는 표지판이 있다. ‘백조일손’과 ‘학살터’를 안내하는 허름한 표지판이다. 그래서 안심이다. 한국전쟁이 발생하자 모슬포 경찰은 내무부 치안국의 지시에 따라 관내 한림읍, 대정읍, 한경면, 안덕면 일대 344여 명을 예비검속했다. 대부분 농민, 마을유지, 교육자, 청년단체, 학생들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주민들은 고구마창고, 어협창고, 각 지서 등에 구금되었다. 일제가 우리 민족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예비검속법’에 근거해 ‘불순분자’라는 이름으로 구금한 것이다.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되고, 부산으로 퇴각하면서 군은 경찰에 의해 구금된 민간들을 분류하여 섣달오름 등에서 사법절차 없이 무려 132명을 학살했다. 그리고 유족들에게 시신도 보여주지 않고 돌을 쌓아 암매장을 하고 출입마저 통제했다. 나중에 유족들이 시신을 확인했을 때 겨우 머리뼈, 등뼈, 팔다리뼈를 적당하게 맞추어 132구를 안장했다. 조상이 다른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되어 한 자손이 되었다는 의미로 ‘백조일손(百祖一孫)’이라 했다. 이 비극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연좌제라는 사슬로 살아있는 자식들의 삶마저 철저하게 파괴했다. 심지어 경찰서장의 지휘로 만행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묘비 파괴와 강제이장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50여년이 지난 후 문민정부에 위령비가 세워지고 첫 민관합동위령제가 열렸다.

이렇게 모슬포 일대의 민간이들이 무참히 학살되고 시신이 묻힌 곳은 1930년대 민간인을 강제동원하여 일본 공군비행장인 알뜨르 비행장과 격납고를 만들었던 곳이다. 전투기를 보관하는 격납고가 무려 20개가 만들어졌고, 그 모습은 지금도 잘 남아 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남태평양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본토와 가까운 제주와 거제와 부산 일대에 최후의 방선을 구축했다. 2910년 태평양지역 젊은 학생들은 제주 모슬포에 모여 평화의 증진과 교육 그리고 체험의 장인 ‘태평양 징검다리’라는 평화공원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알뜨르 비행장에 만들었던 비행기 격납고
일제강점기 알뜨르 비행장에 만들었던 비행기 격납고

모슬포 대방어, 귀해졌다

모슬포 항으로 접어드는 곳에는 상징물도 거리 이름도 ‘방어’다. 그런데 의외로 제주사람들에게 방어는 친숙한 어류가 아니다. 제주음식을 연구하는 양용진 셰프(낭푼밥상 대표)는 방어가 오래된 제주의 식재료는 아니라고 한다. 사실 수산물이 지역음식으로 정착하기 쉽지 않다. 어류는 대부분 정착성이 아니고 수온과 환경에 따라 이동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국, 자리젓, 옥돔국, 매역새우럭국처럼 모자반(몸), 자리, 옥돔, 어린미역(메역새) 등 다른 지역에서도 서식하지만 제주의 독특한 음식으로 바뀌었을 때는 사정이 다르다. 방어는 어떤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법성포나 칠산바다에서 조기가 잡히지 않지만 굴비는 영광이라는데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방어는 지역문화라기 보다는 마라도나 모슬포 사이에서 잡혀 전국으로 유통되는 규모다.

위판을 준비하는 모슬포 수협 위판장
위판을 준비하는 모슬포 수협 위판장

더구나 최근 수온상승으로 모슬포, 가파도, 마라도 어장의 방어어획량이 시원찮다. 오히려 동해 삼척, 고성, 포항 등에서 많이 잡힌다. 방어는 수온이 내려가면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 제주도 인근에서 겨울을 난다. 그곳에서 멸치, 자리, 정어리를 먹으면서 산란 준비를 한다. 몸이 커지고 살과 기름이 오른 ‘배지근한 맛’이 모슬포 대방어의 특징이자 자랑이다. 몇 년 전부터 방어축제를 위해 동해안 방어를 가져오기도 한다. 아예 동해에서 잡힌 소방어나 중방어를 통영에 있는 가두리에서 축양해 겨울철에 출하한다.

시간이 갈수록 해수면 온도가 높아지면서, 제주의 방어는 떠나고 있다. 금년에도 마라도 해역에 많은 배들이 방어를 잡고 있지만 중방어뿐이다. 소비자들의 요구는 ‘대방어’다. 언론이 만들어낸 식습관이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대방어는 적게 잡히니, 동해에서 잡힌 대중방어나 소방어를 잠시 사료를 주며 통영해서 소비가 많은 철에 내놓고 있다. 모슬포의 중방어와 일부 잡히는 대방어가 설 자리가 없다. 직접 방어회를 떠주고, 택배도 가능한 식당들도 한산하다. 한참 붐벼야 할 때인데, 식당이나 방어잡이 어민이나 울상이다.

기왕 모슬포를 갈 거라면 ‘대정오일장’이 열리는 날 맞춰 가면 금상첨화다. 대정오일장은 표선오일장과 함께 서부지역의 가장 큰 오일장이다. 생선, 건어물, 젓갈과 반찬, 과일, 옷과 신발, 고기국수, 국밥, 어린모종까지 갖춰져있다. 오일장에서는 모슬포와 대정 일대의 제주에서 가장 너른 뜰을 가지고 있는 고을과 어장이 좋고 풍요로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운이 좋다면 소소한 행복은 모슬포에 앞 바다에서 다가올 수 있다. 그곳은 우리나라에서 돌고래를 관찰하기 가장 좋은 바다다.

지난해 모슬포 상·하모리 지역은년 도시재개발 뉴딜사업 지구로 선정되었다. 모슬포의 중심 산물이었던 신영물의 영화를 복원하겠다는 의지이다. 이곳에 일제강점기의 교회, 육군훈련소, 교회, 통조림공장, 단추공장, 어업조합창고, 들망어업의 혁신을 이루어낸 어부의 기념비 등 포구를 둘러싼 자원이 차고 넘친다. 어디 그뿐인가 멀리 마라도와 가파도 그리고 돌고래를 볼 수 있는 작지만 옹골찬 바다가 있다. 바다만 아니라 모슬포 대정 사람들도 작지만 옹골차고 지혜롭다. 이런 사람을 제주에서는 ‘몽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더 걱정이다. 그나마 위태로운 신영물, 예지물 그리고 겨우 흔적만 남은 포구의 골목과 옛건물이 재생이라는 이름을 흔적마저 지워지지 않을까 싶어서다. 부디 기우이기를 바랄 뿐이다.

방어 상징물
방어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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