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바다 지켜온 선각자들 제1회
쪽빛 바다 지켜온 선각자들 제1회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3.11.13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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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만주로 간 열세살 소년

새 다큐멘터리 연재를 시작하며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본지는 2006년 5월호부터 선장 출신 千金成 해양작가(한국해양문학가협회 고문)의 자전적 항해기 <불타는 오대양>을 시작으로 <한국 어민사>, <원양어업 개척사>, <해운산업 개척사>, <조선산업 개척사>에 이어 지난 호까지 세계 해양문학을 해부한 <세계 해양문학 순례>를 연재하면서 오늘날 해양강국으로 우뚝 선 우리나라 해양사상의 정립과 함께 장기간 독자들에게 유용한 읽을거리를 제공해 왔음을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이에 본지는 이번 호부터는 독자들의 뜨거운 요청에 부응해 수협중앙회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지금까지 우리나라 어촌은 어떻게 발전해 왔으며, 우리나라 수산업은 과연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고찰하는 새로운 시각의 다큐멘터리 <쪽빛 바다 지켜온 선각자들> 연재를 시작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뜨거운 성원과 함께 현대 대한민국 어업사를 총정리한다는 뜻에서 귀중한 자료 제공과 증언도 기대합니다.

제 1부 만주로 간 열세 살 소년 


  1


아직도 한반도가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1939년 4월 초순 한밤중, 잔뜩 웅크린 모습의 그림자 하나가 마당으로 나서는가 싶더니 이윽고 반쯤 열린 사립문을 통해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달빛도 없는 야밤중이어서 자세히 분간하기는 어려웠으나, 까까머리에 중학생 교모를 눌러쓰고 까만 무명 학생복을 입은 열서너 살가량의 소년이 분명했다. 그림자는 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었는데, 그처럼 애써 발소리를 죽인 것은 아마 엊그제 산 신발에 흙먼지가 묻을까봐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사립문을 빠져나오자마자 그림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읍내로 이어지는 한길을 단거리 주자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남녘에서는 이미 벚꽃 이파리가 함박눈처럼 흩날려 떨어지는 늦봄이었으나 산골 분지의 한밤중은 아직도 옷깃을 여며야 할 만큼 쌀쌀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한참 달리다보니 곧 숨이 가빠지면서 땀이 내배자 소년은 잠시 달리기를 멈추고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아까처럼 재차 달리기를 계속했다. 그 한 가지만으로도 소년은 무엇에 쫓기거나 아니면 어디 먼 곳으로 도망을 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소년은 연신 왼손으로 상의 안 호주머니를 눌러 보기를 되풀이하였는데, 두툼한 감촉이 확인되자 슬며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그 두툼한 감촉이야말로 부친이 무슨 장사를 해보겠다며 일본인 사채업자에게서 고리로 빌린 45원이나 되는 지폐였다.

소년은 두 번째 계모와 딴 살림을 차린 아버지에게로 가 하룻밤 자는 체하고는 급기야 돈을 훔쳐내어서는 지금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누구도 찾아낼 수 없는 낯선 타향 땅으로 도망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소년은 우선 마을로부터 멀리 벗어나 기차역이 있는 경북 김천으로 나갈 작정이었다.

그렇다면 아직도 부모 품에서 한창 어리광이나 부려야 할 코흘리개 소년이 집을 뛰쳐나온 연유는 무엇이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저간의 사정이 어떠하였는가를 알아보는 게 순서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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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1925년 2월 16일, 서부 경남에서도 가장 오지라 할 수 있는 함양군 인의면 작은 마을에서 어느 농사꾼의 여섯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당시 민초들의 살림 형편이란 게 모두 그러했지만, 특히 소년의 아버지 되는 사람의 무능에다 무재주로 집안은 민초들의 최하층인 소작농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채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나마 모친의 끈기와 근검절약 덕분에 나중 한두 마지기의 전답을 장만하면서 비로소 발을 뻗고 잘 수 있는 초가 한 칸이나마 장만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소년이 후일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을 들을 만큼 뭐 대단한 재목으로 자라날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일곱 살 때 서당에 들어간 소년은 천자문이며 동몽선습 등을 익힌 다음, 여덟 살 때 비로소 공립 소학교에 들어가면서 정규교육을 받는 행운아가 돼 있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아들이건 딸이건 가리지 않고 학교에 보내기보다는 마소에 꼴을 먹이는 일을 시키거나 아니면 밭갈이로 내모는 게 효자로 인식되던 때여서 소학교에 다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기대는 뜨겁기 한량없었다. 지금도 자신 있게 하는 말이지만, 바로 그 짧은 소학교 시절이야말로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행복하고 만족했었다고 소년은 회고하고 있다.

하지만 불행의 씨앗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중학교 진학을 앞두었을 때 ‘너 하나만 믿고 산다’던 모친이 눈을 감은 게 그것. 아침 등교 길에 꽁보리밥 도시락을 건네며 잘 다녀오라고 말씀하시던 어머님의 죽음은 아마도 따끈한 산후조리도 없이 가사에 무리하게 손을 댄 게 그 원인이 아닌가 싶었다. 어머니는 눈을 감기 전 여섯 번째인 막내를 낳았는데, 울어 보채는 핏덩이를 살리려고 마을 아낙네들로부터 얻은 동냥젖으로 며칠을 버텼으나 그나마도 여의치 않아 결국 죽음으로 내몰고 말았다. 게다가 두 살 터울의 그 위 동생도 연초에 죽었으므로 한꺼번에 세 번이나 되는 줄초상을 치르는 횡액을 당한 셈이었다.

가난을 업으로 여기던 집안에서 기둥이었던 모친이 눈을 감자 가세는 일순간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소년의 어머니를 집안의 기둥이라 칭하고 있지만 그래봤자 시골 아낙에 불과했고, 따라서 갖가지 행적으로 미루어 아버지 역시 필부필부(匹夫匹婦)에 지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소년은 그럭저럭 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나 우선은 먹고 사는 게 큰 숙제였다. 그리하여 맏형과 둘째 형은 일찍이 돈을 벌겠다며 각각 일본과 타지로 떠나갔다가 모친별세 소식을 듣고 돌아왔으나 살림은 아직 처녀티조차 가시지 않은 큰형수에게 맡겨지면서 대식구는 말 그대로 입에 풀칠하기도 벅차해 하고 있었다.

그 판국에 아버지는 두 번째 계모를 얻어 멀리 떨어진 곳에 딴 살림을 차리면서 자식들을 고아 아닌 고아로 만들고 말았다. 기록에 의하면 고모 등 집안 어른들의 성화 때문이었다지만, 그게 변명이나 이유는 될 수 없었다. 후일 소년은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몇 권의 저서를 남기게 되는데, 어느 대목에서도 부모며 친지들의 이름자를 일체 밝히지 않고 있음을 볼 때 아마도 어린 시절 겪은 궁핍과 외로움의 표출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 결과 소년은 아버지의 장사 밑천을 훔쳐서는 먼 유랑길로 내달렸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가 고향을 등지기로 한 데는 구제 중학교인 밀양농잠 입학시험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신 게 결정적 요인이었다.

소학교 시절 그의 성적은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 없을 만큼 우수했다. 그리하여 졸업을 앞둔 때 선생님들은 전통의 대구사범이든 밀양농잠이든 응시원서를 제출하기만 하면 합격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장담해온 터였으나 청천벽력 같은 불합격 통보가 날아든 것이었다.

당시의 심경을 그는 후일 자신의 저서 <나와 제3·4공화국>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 사흘 밤낮을 울어 보냈다. 창피스러워 삽짝 문을 나서지도 못 했다. 머리가 좋다더니 그깟 중학시험에도 낙방한 엉터리라고 마을사람들이 큭큭 웃으며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아서였다. 세상이 싫었다. 부모는 물론 학교도 세상도 모두 나를 버렸다!…… 아예 학업을 포기하고 농사꾼으로 파묻힐까 했으나 쟁기질할 땅뙈기 한 뼘 없는 처지였다. 그 같은 차가운 고향 땅에 무슨 애착이 갈 것인가. 그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아주 멀고 먼 세상으로 떠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게 소년의 가출 이유인 것이었다. 


  3


동이 틀 무렵 소년은 예로부터 ‘정든 님이 바라다 준다’는, 박달재만큼이나 유명한 ‘바라기 고개’를 넘고 있었다. 그 너머가 거창읍이었다. 그곳에서 소년은 눈부신 햇살 속의 고향 땅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정오 무렵 소년은 거창읍에서 화물차 편으로 김천읍에 도착했으나 아직도 방향을 잡지 못 했다. 집을 떠나올 때 딱히 어디로 간다는 계획도 세우지 않았으므로 그저 낯선 타향 땅을 발길 가는 데로 움직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솟을대문의 잘 생긴 기와집 하나를 발견했다. 처마 높다랗게 ‘김천역’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타기만 하면 어디로든 아주 먼 세상으로 자신을 데려다 줄 기차역이었다.

역은 사람들로 붐볐다. 모두 짐 보따리를 을러메거나 움켜 안은 여행객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맨손이었다. 이미 학업을 포기한 그에게 몇 권의 책도 거추장스러워서였다.

그러다가 그도 모르는 사이에 매표구 앞으로 줄지어 선 사람들 틈에 끼게 되었다. 앞줄에서 경성이며 평양이라는 말이 번갈아 들렸다. 모두들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뚜렷했다. 그제야 소년은 자신이 아직도 목적지를 정하지 못 하고 있음을 알았다.

바로 그 순간 앞의 중년신사가 ‘호멘 한 장’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지금의 심양(瀋陽)인 오래 전 봉천(奉天)의 중국 발음이었다. 그 말을 듣고 소년도 ‘나도 호멘 한 장’ 하고 말했다. 그 승차권이야말로 소년을 저 낯설고 광대무비(廣大無比)한 만주 벌판의 어느 곳으로 태워다 줄 차표인 것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당시 나라는 일제 치하 식민지여서 더러는 일본인들의 압제와 수탈을 견디지 못하고 피신 삼아, 혹은 힘을 길러 조국광복에 헌신하겠다는 야멸찬 구국정신 등 갖가지 그럴 듯한 사유로 거의 야반도주하다시피 만주로 향하는 기차를 타는 게 유행이던 시절이었다. 바로 그 미지의 땅으로 시방 한 소년이 모험에 가까운 북상의 대열에 합류해 있는 것이었다.

시커먼 목탄연기를 내뿜는 기차는 수시로 정차하기를 밥 먹듯 하면서 경성과 평양과 신의주를 지나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 땅으로 들어선 다음 드디어 목적지인 호멘 역에 도착했다. 사흘 밤낮을 달려온 길고도 지루한 여행의 끝이었다.

소년은 역사 앞 광장으로 나온 다음에야 비로소 자신이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처지임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발길을 되돌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벌써 사나흘 전부터 부친은 장사밑천이 몽땅 털린 것을 알고 노발대발, 틀림없이 돈을 훔쳐간 셋째 아들놈을 찾아 온동네를 이 잡듯 뒤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소년이 이곳에서 할 일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 우선은 주린 배를 채우면서 자그만 몸뚱이 하나 의탁할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하는 게 그것이었다. 시방 호주머니에는 약간의 지전이 들어 있지만, 한 푼이라도 함부로 헐어 쓸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 돈이야말로 목숨보다 더 귀중한 마지막 보루이자 비상약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소년은 한 가지 옹골찬 다짐을 하기에 이른다.

- 난 지금 열세 살이다. 내 앞에는 미지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지금부터 세상의 어떤 풍파와 대결하더라도 꼭 견뎌내야 한다. 그렇지 못 하면 죽는다. 아직도 청춘이 만 리인데 죽을 수야 없는 일 아닌가. 그래, 두고 봐라! 내가 스무 살이 될 때면 보란 듯이 기반을 닦은 성공한 사람이 되어 있을 터이니!

고향과 달리 아직도 살얼음이 서걱서걱한 만주 벌판의 호멘 역 광장에서 소년은 그렇게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있었다. 

▲ 광복 이전의 경북 김천역.


  4


어느덧 땅거미가 진 시각이어서 소년은 역 인근의 어느 허름한 여관으로 찾아들어갔다. 몸을 뉘이고 이불을 끌어당기니 그만 식은땀이 흐르고 사지가 오그라들면서 온몸이 펄펄 끓기 시작했다. 그간 너무 긴장한데다 험난하고 긴 여정이 몸살을 불러온 것이었다. 약도 변변히 먹지 못한 채 소년은 그렇게 뒹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마당이 희번할 무렵 두런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니 중국인 주인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방안을 살피고 있었다. 도대체 이틀 밤낮을 꼼짝도 않고 있어서 무슨 일인가 싶었다는 것이다.
중국말을 모르는 소년은 필담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 朝鮮 咸陽 出身, 13歲…….

경남 함양 출신 열세 살 소년으로, 청운의 뜻을 품고 낯선 중국 땅을 밟았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여관 주인은 잔심부름이나 하며 여기서 지내도 좋다고 말했다. 사고무친인 주제에 마다할 일 아니었으나 사나흘 머무는 동안 이 여관이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님을 알았다. 기차역 인근이라 드나드는 객도 많은데다가 거진 곤드레만드레 주정뱅이들이었고, 심지어 아편중독자에 뒷골목 여자들까지 서성거리는 홍등가에 다름 아니어서였다.

여관을 나온 소년은 마땅한 일자리를 찾아 낯선 도시를 헤매고 다녔다. 하지만 말도 서툰데다 소학교만 나온 열세 살짜리 소년을 받아줄 누구도 없었다. 그렇게 며칠 허탕을 쳤다. 그동안 호주머니도 홀쭉해졌다.

그러다가 철서구(鐵西區) 공장지대 인근의 담벼락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광고 전단지 하나를 발견했다.

- 日常用品 取扱, 店員 急求.

식료품 등 일상용품을 취급하는 가게가 점원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가게는 가까이에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방문 목적을 말했더니 위아래를 한참 훑어본 중국인 주인이 소년의 행색이 안쓰러웠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난생 처음 일자리를 구한 것이었다. 잠자리는 창고 천장 가까이에 널빤지를 잇댄 다락이었으나 그만으로도 천국에 오른 기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소년은 어지러운 창고를 정리하고 가게 앞길을 빗자루로 쓴 다음 진열대 유리까지 깨끗하게 닦았다. 그 모습을 본 주인은 표정이 달라지며 어깨를 토닥여 주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 날 오후, 소년은 쫓겨나고 만다. 점원이 해야 할 일이 인근 식당이나 주택으로 일용품 등을 배달하는 것인데, 소년은 그 때까지 한 번도 자전거를 타본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백화점 규모의 대형 약국이었다. 그곳에서도 배달이 필수여서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게 된 소년은 하루만 여유를 주면 자전거 타기를 익히겠다고 통사정했다.

“그만하면 됐다.”

두어 시간 곡예를 부린 끝에 가까스로 중심을 잡는 소년을 보고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열심히 일했다. 몇 개씩이나 되는 박스를 싣고 경사진 길을 오르는 일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그럴 때면 아예 내려서 끌고 가는 식으로 사생결단 임무를 완수했다. 황량하고 낯선 만주에서의 삶은 말 그대로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5


하지만 고달프고 외로운 타국생활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악몽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중학 입시에 낙방하고 스스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몇 달 전의 악몽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주어진 시간 틈틈이 주경야독으로 책을 읽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가게 청소며 배달 일을 하고, 밤 10시 문을 닫으면 목욕을 한 다음 한밤 2시까지 공부하는 식이었다. 교재는 일본 와세다대학이 개설한 중학 과정의 강의록이었다.

그의 첫째 목표는 전문학교 검정시험에 합격하는 것. 그런 다음 야간대학에 적을 올릴 작정이었다. 그렇게 1년여의 세월이 흐르자 이제는 강의록을 달달 외울 정도가 되었다.

그 와중에 사고가 터졌다.

약국 왕(王) 사장은 역시 중국인다운 수전노였다. 특히 야밤중까지 전등불을 켠 채 책을 읽는 소년을 못마땅해 한 게 그 증거였다. 흐릿한 백열등이었는데, 전기세가 많이 나간다는 이유였다. 그 눈총에 책을 덮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좀 전에 읽던 글이 실타래처럼 이리저리 허공을 맴돌아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궁리한 게 이불을 뒤집어쓴 채 플래시 불빛으로 책을 읽는 방법이었다. 이제 수전노의 타박을 듣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그 날도 이불을 뒤집어쓴 채 책을 읽고 있는데, 밖으로 인기척이 느껴져 무심코 이불을 들추고 보니 왕 사장 부인이 두 눈을 홉뜬 채 석고가 돼 있는가 싶더니 그만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나자빠졌다. 나이 마흔 살의 부인은 장독처럼 부풀은 이불 속으로 흐릿한 불빛에 일렁거리는 야릇한 형상을 보고 귀신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 사고로 출산을 겨우 한 달여 앞두고 그만 유산을 하고 말았다.

왕 서방은 노발대발했다. 초주검이 되도록 매질을 가하고 창고에 감금한 다음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그는 틀림없이 죽고 말 처지였다. 당시 만주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 한둘을 패 죽였다고 해서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런 혼란극치의 살벌한 지옥 그대로였다. 하물며 보호자도 없이 홀로 흘러들어온 겨우 열대여섯의 조선인임에랴. 창고에 며칠 감금된 소년 자신도 이로써 마지막이라는 낙담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사나흘 후 야밤중, 창고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더니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주방 일을 하던 중국인 부부였다.

“아이고, 이러다 죽고 말겠네.”

그러면서 당장 도망치라고 부추겼다. 고맙다는 인사를 할 틈도 없었다. 보따리를 챙기지도 못한 채 영하 30도를 웃도는 호멘 거리를 무작정 내달렸다. 그러다가 어느 골목길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나 지나서였다. 철도역 가까이의 거지 소굴이었는데, 양아치 왕초가 그를 구해준 것이었다. 밥 동냥은 기본이고, 고물 수집과 도둑질이 본업이지만 마음씨는 오히려 따뜻했다. 게다가 검정고시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해서 마지막 피치를 낼 수 있었다. 덕분에 소년은 합격의 영광을 얻었고, 이어서 대학 과정인 봉천학원 정경과(政經科) 야간부에 적을 올렸다. 1941년 4월, 열여섯 때의 일이었다. 


  6


4년간의 대학 과정은 그에게 지식 함양은 물론 세계정세에 대한 개안(開眼)의 기회도 제공했다. 그는 많은 책을 읽었다.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원리 등을 공부하면서 그 지식을 또래 청년들에게 전파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뜻을 함께하는 친구들과 독서회를 결성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태평양전쟁도 막바지여서 일본이 패망하면 곧 새 시대가 개막될 것이라는 희망적 관측이 팽배해 있을 때였다.

그가 일시적으로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대학을 졸업한 직후인 1945년 초봄이었다. 고향을 떠난 지 7년만이었고, 일황의 무조건 항복을 불과 넉 달 앞두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고향은 예전과 달랐다. 이제는 어엿한 청년이 되었지만, 초라한 행색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이태 전 돌아가셨고, 형제들은 막노동으로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고향은 여전히 그를 반겨주는 누구도 없는 차가운 세상이었다. 게다가 서부 경남 일원에서 왜놈 앞잡이 노릇을 하며 떵떵거리던 아저씨뻘과 대판 다투면서 그만 쫓겨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집안 어른들은 그의 부친이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간 건 순전히 불효자식 때문이라는 우직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때 형제들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 했다. 쫓겨난 그는 다시 호멘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시국도 시국이어서 호멘 주재 일본경찰의 발악은 극에 달해 있었다. 먹물을 먹은 중국인이나 한국인들이 그 표적이었다. 고등계 형사들은 조금만 눈 밖에 나도 무조건 잡아다 족치는 게 본업이었다. 그 와중에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힌 그도 경찰서로 끌려가 치도곤을 당했다. 갖가지 악랄한 고문은 며칠이나 계속됐다. 말 그대로 이현령비현령 식의 사람 때려잡기였고, 죽이기도 예사였다.

다행히 약국에서 일할 때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던 어느 중국인이 보증을 서줘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불러 세운 주재소장은 일본군에 입대하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유치장에 그대로 있다가는 반병신이 될 게 뻔하였으므로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우선은 손도장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일주일간 신병훈련을 받고 일본군 병사가 된 그는 소련군과 대치한 무단강(모란강) 인근 부대에 배치됐다. 대부분 조선인들이었고, 거의 40대를 넘긴 초로들이었다. 종말이 가까운 일본군은 최악의 경우 병사들을 인간방패로 쓰기 위해 그 같은 부대를 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인 8월 6일, 히로시마에 무슨 폭탄 하나가 떨어지면서 한꺼번에 10만 명도 넘는 일본인이 몰살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사흘 후인 9일에도 똑 같은 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되면서 마찬가지로 도시가 초토화됐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바로 그 날 소련군이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에 이어 조국광복을 담보하는 일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이 8월 15일 전파를 탔다. 회고해 보면 1910년, 일제의 일방적인 합방선언 이래 35년간이나 한반도를 포함 중국대륙을 노략질한 일본군의 영원한 괴멸이자 소멸인 것이었다.

자유의 몸이 된 청년은 걷거나 혹은 차를 얻어 타는 식으로 겨우겨우 3천 리도 넘는 호멘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비로소 세상이 뒤바뀌어 있음을 알았다. 시가지는 이미 태극기와 청천백일기가 물결치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그야말로 감격과 감동의 도가니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축제 퍼레이드는 오래 가지 않았다. 육중한 탱크를 앞세운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일본과 관련된 시설물을 몽땅 파괴하기 시작하였고, 뒤따른 군중들은 살육과 방화와 약탈을 일삼는 폭도로 돌변한 게 그것이었다.

그 와중에 청년은 해방조국의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는 다짐으로 하나의 조직을 결성했는데, 그게 곧 ‘조선건국청년단(朝鮮建國靑年團)’이었다. 그러고 보니 할 일도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몇몇 청년들과 함께 드디어 평생을 헌신하고 공헌할 각오로 서울로 향했다.

고국도 해방의 감격으로 물결치고 있었지만, 그것은 곧 혼란과 무질서로 뒤범벅된 광란의 소용돌이에 다름 아니었다. 도심은 무작정 뛰쳐나온 인파로 넘쳐났고, 서너 개 널빤지가 세워진 담벼락만 있으면 거기에는 반드시 대중을 선동하는 벽보가 덕지덕지 나붙어 있었다. 구호는 통일에서부터 신탁통치 반대, 남한 단독정부 수립 등의 어지러운 문구 일색이었다. 아직 나라는 방향과 구심점이 설정되지 않은 말 그대로 사분오열, 지리멸렬 그대로인 것이었다.

그 혼란상을 본 청년은 나름대로 정세를 분석했다.

-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시국을 하루라도 빨리 안정시키려면 무엇보다도 국민적 대통합부터 이뤄야 한다. 그러려면 국민으로 하여금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할지를 깨우치도록 해야 한다. 국민을 대오각성시키는 일, 그게 나라를 구하는 길이다.……

그 같은 인식에서 그는 인천에서 발간되고 있던 한 일간지의 정경부장을 맡는다. 유별난 문장가는 아니지만, 학창 시절 책을 많이 읽은 덕분에 웬만한 신문기사 정도는 끼적거릴 수 있었다.

그가 사회적 지도자의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우주탄 선언(宇宙彈宣言)>이라는 시국관을 정리한 소책자의 발간이 그 계기였다. 해방 직후의 혼란과 이념대결로 야기된 민족의 분열상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국민적 대통합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그 사상이야말로 이승만 대통령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대국민 호소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책에는 이승만, 김구, 이범석 등의 휘호가 들어 있었고, 김규식의 추천사도 실려 있었다.

바로 그 가출소년이 그로부터 30년 후인 1968년 대한민국 수산업 조직의 구심체인 수협중앙회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가 이 나라 1백만 어업인들의 이익증대와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한 수협중앙회 5대 회장 박상길(朴相吉)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길을 걸어온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호로 넘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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