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명운은 바다에 있다'
'우리 민족의 명운은 바다에 있다'
  • 김영섭 부경대학교 총장
  • 승인 2013.09.12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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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업은 오늘의 대한민국 있게 한 원동력

 

▲ 김영섭 총장은 부경대학교, 동대학원 수산물리학과(수산학 석사)를 졸업했으며, 일본 동경대 대학원에서 이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부경대 교수, 부학장, 대한원격탐사학회 회장, 부산시정연구위원 등을 역임했다.
지난 7월 27일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60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그 이튿날 부경대학교에는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존 필립 키 뉴질랜드 총리를 비롯해 뉴질랜드 참전용사와 가족 등 130여명이 온 것이다. 이들을 학교로 초청해 오찬을 대접한 사람은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이었다. 그동안 김 회장은 뉴질랜드 명예영사를 맡아 양국 간 우호친선을 위해 민간외교관으로 봉사해오고 계셨다. 아시다시피 김 회장은 1958년 부경대학교 전신 부산수산대학교 어로과를 졸업한 후 바다로 진출, 동원그룹을 연매출 4조2천억 원대의 글로벌기업으로 성장시킨 주인공이다.

김 회장은 1954년부터 1958년 2월까지 부산수산대학교를 다녔는데, 그 때는 전쟁이 막 끝난 직후였다. 그 당시를 김 회장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1954년 입학 당시 대학 건물이 미군에 수용돼 있던 터라 판잣집 같은 데서 수업을 받아야했다”고.

그렇다. 부경대학교는 한국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다. 대학 건물은 전쟁 직후부터 1957년까지 7년 동안이나 징발돼 전쟁 부상자 치료를 위한 미국 및 스웨덴 야전병원으로 사용되면서 교육환경이 황폐화됐던 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또 부경대학교에는 미군이 전쟁 때 임시 사령부 건물로 썼던 ‘워커하우스’가 있다. 당시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와 낙동강 방어선(일명 워커라인)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통신장비를 보호하려고 대구의 미8군 사령부를 1950년 9월 6일 부산수산대학교로 옮겨 전장을 진두지휘했다.

김 회장은 이날 뉴질랜드 총리와 참전용사들 앞에서 이렇게 인사말을 했다. “여러분이 전쟁을 마치고 부산항을 떠났을 때 헐벗은 모습의 부산이 이제는 이처럼 훌륭한 모습의 인구 400만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이곳 모교 부경대는 전쟁 직후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조그마한 학교였는데 이제는 재학생이 2만 명을 넘고 세계 60여 개 국가에서 유학을 오는 글로벌 해양메카로 성장했다. 오늘날 이 같은 한국의 번영은 참전용사 여러분이 목숨을 걸고 지켜주신 덕분이다.”

김 회장은 전쟁의 참화라는 고통을 딛고 발전한 모교와 부산, 그리고 한국의 변화된 모습을 참전용사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의 소중한 희생에 감사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같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었던 김 회장의 이날 오찬에 초대된 뉴질랜드 참전용사들은 매우 감동을 받은 모습이었다. 뉴질랜드는 한국전쟁에 6,000여명을 파병해 41명이 전사했고 유해 34기가 UN기념공원에 봉안되어 있다.

이날 존 필립 키 총리도 시종일관 매우 유쾌한 모습이었다. 그는 “전쟁을 딛고 한국이 오늘날 경제적 성공을 이루고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국가로 성장한 데는 교육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면서 “교육자들이 한국 젊은이들을 변화시켜 국가발전을 이끌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존 필립 키 총리는 한국의 성공 뒤에는 교육의 역할이 컸다고 말했는데, 여러 가지 학문 가운데 해양수산의 역할이 컸다. 수산입국의 싱크탱크였던 부경대학교는 전쟁과 가난을 극복하고 우리가 힘껏 도약할 수 있게 해준 플랫폼이었다.

1950년대를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는 전쟁의 폐허 뿐 아무것도 없던 시대였다. 그야말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헐벗은 때였다. 그래서 ‘수산입국’이라는 국가적 어젠다가 나오게 된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1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원양어업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부산수산대를 직접 방문해 교수들과 외화획득 방안을 논의했던 것이다. 당시 국가 예산의 약 1/1000을 투입하여 부산수산대의 원양실습선 백경호(400톤)를 건조했다.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실습선 이름을 명명했고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실습선 진수식에 참석했을 정도로 백경호 진수는 국가적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선배들은 새로운 어구어법기술을 개발하고 처음 해외어장을 개척해 전쟁의 폐허로 굶주리고 있던 국민에게 수산식량을 제공하고 외화를 벌어들였다. 그즈음 외국에서 벌어들인 달러의 20~30%가 원양어업에서 나왔고, 수출의 36%가 수산물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수산의 위력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수산업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바다는 우리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수산업이 공업화의 기반이 됐고 현재 글로벌 경제대국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처럼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우리 민족의 명운은 단연코 바다에 있다. 오늘날 육상자원고갈과 기후변화라는 위기 극복의 유일한 답은 바다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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