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대쉬의 <바타비아 호의 무덤>
마이크 대쉬의 <바타비아 호의 무덤>
  • 천금성
  • 승인 2013.08.1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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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海洋文學 순례 ①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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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필자는 먼저 번역본의 문장과 관련, 한 가지 양해를 구한다. 원저자는 처음부터 원고 분량을 늘일 의도에서였던지, 아니면 글재주에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첫 문장부터 ‘1629년 6월 3일 저녁, 땅거미가 질 무렵……’라는 식으로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바람에 박진감과 긴장감을 모두 떨어트리는 역효과를 내고 있다는 판단에서 군더더기를 모두 걸러낸 아주 간결한 문장으로 교열(校閱)하였음을 먼저 밝힌다. 

영국 역사학자 마이크 대쉬(Mike Dash)가 당대의 기록을 근거로 재구성한 《바타비아 호의 무덤(Batavia’s Graveyard)》은 이렇게 시작된다. 

- 1629년 6월 3일, 어스름한 달빛이 인도양 동부의 넘실대는 바다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달빛 속에서 파도의 골과 마루를 타고 부침(浮沈)을 되풀이하는 하나의 검은 물체가 보였다. 그것은 뒤쪽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북으로 항진 중인 한 척의 배였다.……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무역선 바타비아 호로, 배에는 시방 선원과 적어도 스물두 명의 여성을 포함한 승객 322명이 타고 있었다.…… 

이어지는 묘사는 이렇다. 

- ……작년 10월 말 암스테르담을 출항한 바타비아 호는 벌써 7개월째 처녀항해 중이었는데, 목적지인 자바 섬의 무역거점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30일을 더 항해해야 했다.…… 

문제의 바타비아 호는 당시로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배였다. 길이 48미터에 배수량 1,200톤인 그 배는 3개의 대형 돛대에 모두 30문의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고, 순풍을 받으면 하루 평균 2.5마일을 항진할 수 있어서 30일이라면 그 거리는 대략 1,800마일에 상당한다. 

작품의 도입부인 두 인용문만으로도 바타비아 호의 앞길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여기에 ‘당시까지도 그 항로는 미지의 세계에 속해 있었고, 비치된 해도조차 부실하여 거의 무용지물에 다름 아니었다’라는 대목에 이르면 이미 예측의 울타리를 훨씬 뛰어 넘는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 배는 조만간 어떤 위험에 처할 게 분명하고, 300명도 넘는 탑승자들의 운명은 벌써 바람 앞의 등불 처지가 되고 말 터이다. 더욱 시선을 사로잡는 건 그 행역에는 이전까지 결코 어느 네덜란드 국적의 배가 범접한 적이 없는 아주 낯선 바다였다는 점이다. 원작자는 이를 애써 강조하고 있다. 

어쨌거나 이 책을 번역한 두 공동역자도 덩달아 흥분, 원래 제목인 《바타비아의 무덤》을 젖혀두고 《미친 항해》라 개제(改題)하였을 만큼 희대의 학살극(虐殺劇)으로 이어진 바타비아 호의 비극적 난파기는 이로써 4세기반의 자물쇠를 풀고 처절한 한 편의 영화처럼 리바이벌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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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바타비아 호의 운명을 결정짓는 최악의 순간이 다가온다. 당시의 바다 상황을 보자. 

- …… 그날 밤도 상황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남서풍이 불어오는 가운데 폭풍우나 돌개바람의 징후도 없어 항해하기에 더할 수 없이 좋은 날씨였다. 선장은 전날 계산한 정오위치에 근거하여 배는 지금 ‘어떤 알려진 육지로부터 적어도 600마일 정도 떨어져 있다’고 확신했다.…… 

최악의 사태는 새벽 3시가 지나 일어났다. 고물(선미부) 가장 높은 곳에서 전방을 응시하고 있던 당직자가 수평선 멀리로 보이는 하얀 띠(백파)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그것을 암초에서 피어오르는 물보라가 아닌가 하고, 그 사실을 곧 선장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선장은 물결 위에 비친 달빛이라 일축하고, 침로를 유지하라면서 오히려 모든 돛을 더 펼치도록 했다. 그 결과 바타비아 호는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고 만다. 

- ……바타비아 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수면 위로 반 쯤 솟아오른 암초에 부딪힌 것이었다. 두 번째 충격과 함께 이물(선수부)이 암초를 올라탔고, 키도 파손되었으며, 곧 선재(船材)가 갈라지는 굉음이 고막을 때렸다. 선체가 경련을 일으키는 동안 파열음은 거푸 들렸고, 뱃전 주위로는 깨트러진 산호초 파편들로 석화꽃이 뒤덮였다. 해먹이나 매트에 몸을 누이고 있던 승객들은 모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후의 참상은 실로 목불인견(目不忍見) 그대로였다. 선체는 암초 중앙에 꽉 못박혀 있었고, 아직 펼쳐진 10폭의 돛이 바람을 받으며 선체를 더욱 산호초 중앙으로 몰아붙인 게 그것. 그 상태로 이제 배가 온전히 빠져나가기는 틀린 일이었다. 

더욱 난감한 것은 좌초한 순간의 조류(潮流)였다. 운이 좋아 썰물 때라면 수위(水位)가 곧 올라갈 터여서 덕분에 선체가 떠오르며 암초 밭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원들은 선체를 가볍게 하기 위해 1톤씩이나 되는 대포 30문을 포함한 모든 중량물을 바다에 내던졌다. 하지만 상황은 결코 그들 편이 아니었다. 만수(滿水) 때여서 시간이 갈수록 수위가 올라가기는커녕 오히려 낮아지고 있은 때문이었다. 

공포에 질린 채 그들은 배를 구할 방법이 없음을 알았다. 그들은 결국 부근에 바닷물에 잠기지 않는 번듯한 섬이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무참히 깨어지고 만다. 곧 ‘바타비아 호 무덤’이라 불리게 될 네댓 개 군락의 산호초(아브롤요스 군도)에는 나무도 풀도 자라지 않는 불모지인 데다 갈증을 달랠 웅덩이 하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대목에서 문제의 한 사나이가 등장한다. 선주를 대신하여 승선한 그는 상급자인 대상인(大商人)과 함께 항해가 이익을 낼 수 있도록 화물관리부터 심지어 항해실무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한을 선주(동인도회사)로부터 위임받은 부상인(副商人) 코르넬리스란 자로, 따라서 그의 권한은 실로 선장에게 이래라저래라할 만큼 실로 막강했다. 하지만 그는 승선경력도 없는 약제사(藥劑師) 출신으로, 바타비아 호와 인연을 갖기까지는 온갖 불운을 거듭한 낙오자 신세였다. 매독 증세의 아들을 잃고 아내와 헤어진 그는 ‘일확천금을 꿈꾸고 동양으로 가려는 잡동사니들의 집결지 암스테르담’으로 간 끝에 운 좋게도 바타비아 호의 두 번째 책임자가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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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도 부재한 상황에서 좌초하고 이틀이 지나자 탑승객들은 세 무리로 나누어진다. 

선장과 대상인 등 48명은 보트를 독점하여 곧 파손될 게 분명한 좌초선을 떠나 다른 섬으로 소개해 있었고, 부상인 코르넬리스를 포함한 사관과 병사 등 70여 명은 여전히 난파선에 남아 있었으며, 나머지 180여 일반승객은 나중 ‘바타비아의 무덤’으로 불릴 산호초로 건너가 있었다. 

무슨 일인지 선장은 배를 떠날 때 상당량의 식량과 식수부터 챙기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곧 밝혀졌다. 난파선 생존자들의 안위를 도모하고, 구조되기까지 지휘를 책임져야 할 선장이 구조선을 부르겠다는 명목으로 현장을 이탈, 당초 목적지인 자카르타로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 순간부터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쳤다. 

좌초 사흘째인 6월 6일, 바타비아의 덤으로 분산된 일반승객 180여 명은 자신들이 비로소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았다. 어디에도 갈증을 달래줄 우물도 없었고, 비도 내리지 않아서였다. 그것은 부상인 코르넬리스의 치밀한 음모에 의한 것이었는데, 배 창고에 보관된 식량이나 식수는 아주 제한적이었으므로, 입을 덜기 위해 상대적으로 약한 일반승객들을 거의 강제적으로 떼어낸 것이었다. 

한 모금 물도 마시지 못한 상태로 며칠이 지나자 생존자들은 곧 탈수증으로 죽어가기 시작했다. 궁여지책으로 오줌을 받아 마시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히려 갈증을 부채질할 뿐이었고, 그나마도 사나흘 지나자 찔끔거리는 것으로 그쳐 대책도 되지 못 했다. 그렇게 열 명도 넘는 사람이 죽었다. 

좌초 9일째인 6월 12일, 드디어 끈질긴 파도에 시달린 배가 산산조각 났다. 배에 잔류하고 있던 사람들이 앞 다투어 물로 뛰어들었으나 창날 같은 산호초에 살이 찢기거나 파도에 휩쓸려 70명 가운데 겨우 20명만 살아남았다. 

부상인 코르넬리스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선체에서 떨어져 나온 가름돛대를 붙잡은 채 이틀이나 허우적대다가 가까스로 섬에 다다른 것이었다.


▲ 바타비아 호 복제선. 마이크 대쉬의 '바타비아 호의 무덤'은 우리나라에서는 '미친 항해'라는 제목으로 혜윰출판사에서 번역 출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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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사람이 죽어나갔음에도 난파선 탈출자의 합류로 머릿수는 더욱 늘어났다. 그나마 생존자들을 연명시킨 것은 섬을 둥지로 삼고 있던 바닷새와 바다사자였다. 그러나 워낙 사람이 많다보니 단 열흘 사이에 그 많던 먹잇감도 사라져버렸다. 

선장도 대상인도 없는 섬에서 부상인이 지도자로 부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운영위원회 의장을 자처하고 나섰다. 

처음에는 제법 생존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을 만큼 자기희생적으로 일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인 성격에 인내심이 결여된 게 탈이어서, 그 결과 그는 엉뚱한 궁리를 하기에 이른다. 선장과 대상인이 구조를 요청하러 자카르타로 향한 만큼 미구에 구조선이 나타날 것으로 확신하고서였다. 그 때가 오면 구조선을 탈취하고 해적으로 변신하여 어디 먼 곳으로 잠적한다는 계획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은밀히 동조자를 규합하면서, 동시에 거추장스러운 생존자 수를 줄이기로 했다. 동조자는 대략 스무 명 쯤 되었다. 그 숫자는 나머지 비동조자와 견주어 1대 9의 열세였다. 부상인은 자신의 음모를 실현시키기 위해 그 비율을 1대 2 정도로 낮출 계획이었다. 

무기는 동조자에게만 주어졌고, 나머지는 자신의 관리 하에 두었다. 드디어 희대의 살육 행각이 시작될 참이었다. 

그 방법이 경악스러웠다. 산호초 부근은 군도(群島)여서, 멀리로 몇 개의 섬이 존재했다. 부상인은 행동대로 하여금 섬들을 탐사토록 했다. 그러나 결과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아무것도 없다는 보고뿐이었다. 

그럼에도 부상인은 행동대에게 한 섬을 가리키며 ‘저곳에 식수와 먹을거리가 있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퍼뜨리게 하여 어린아이를 포함한 40여 명을 얼기설기 엮은 뗏목에 태워 건너게 하는 한편, 사관을 포함한 15명은 또 다른 섬으로 이동토록 했다(나중 밝혀진 일이지만, 그렇게 소개된 70여 명은 대부분 사망했다). 그렇게 추가로 인원을 분산시키자 ‘무덤’에 남은 사람은 130여 명으로 3분의 1 가량 줄게 되었다. 

그럼에도 부상인은 사람 숫자가 많다고 생각했다. 본격적인 학살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 순간, 배가 좌초하고 한 달여 지난 7월 첫째 주부터였다. 

가장 먼저 지목된 희생자는 헨드릭스라는 병사였다. 그는 몇 번이나 보급품 천막으로 숨어들어 식료품을 훔쳤으며, 이번에는 포도주 통의 마개를 따다가 발각되었다. 그 병사는 훔친 포도주를 포수(砲手)와 나누어 마셨다. 그거야말로 부상인에게는 더할 수 없는 구실이었다. 운영위원장인 그는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도둑질은 사형 감이라 주장하고, 두 사람을 바다에 내던져 익사(溺死)시키도록 판결했던 것이다. 

또 다른 두 사람은 보트를 타고 달아나려 했다는 죄목으로 동료가 칼로 처형했다. 그 상황과 관련, 바타비아 호 일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남아 있다. 

- 다니엘이 와르나르를 칼로 찔렀는데, 칼끝이 마치 버터 속으로 쑥 들어가는 것 같더라고 말했고, 다른 동료 프레데릭 역시 집행자로 나서서 와르나르를 몇 차례나 난도질하였다.…… 

살육 행위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대상자를 선별, 뗏목에 태운 다음 먼 바다로 나가 손과 발을 꽁꽁 묶은 채 내던지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서 견습사관 리번트는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하고 나서야 겨우 목숨을 부지한 유일한 행운아였다. 

7월 첫 주말에도 살해는 계속되어 5명은 비밀리에, 3명은 절도죄를 물어 공개처형했다. 또 아무 것도 없는 섬에 사람들을 내려놓고 뗏목만 돌아오는 식으로 고립시켜 죽게 만드는 방법도 동원되었다. 

가장 야만적인 경우는 별도의 천막에 격리된 괴혈병과 열병 환자들이었다. 부상인은 그들이 회복될 가망도 없는데다가 식량만 축낸다고 보고 행동대원으로 하여금 한밤중 잠든 틈을 이용해 한 사람 한 사람 목을 땄다. 그렇게 11명이 죽어나갔다. 

7월 중순까지 근 50여 명이 살해되면서, 이제 남은 사람은 9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생존자는 대부분 동조자이거나 살해 행각을 알아차리고 연명하기 위해 부상인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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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물범섬으로 분산 격리된 70여 명 가운데 아직까지 생존한 사람은 45명이나 되었다. 사인(死因)은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었다. 부상인은 그들도 거추장스러웠다. 

그는 7명의 반란자들에게 장검과 단도 등 무기를 나누어주며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죽이되, 당분간 여자들은 살려 두어라!” 

그 무렵 반란자들은 무고한 인명을 살해하는 일에 잔뜩 맛을 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부상인이 약속한 대로, 그렇게 함으로써 나중 돌아올 몫이 더 커진다는 기대감에서였다. 

당시의 살육 행위에 대한 증언을 보자. 

- 레너트가 먼저 한 소년을 칼로 베자 동시에 다른 두 사람이 엉덩이와 옆구리를 베었다. 헨드릭스가 한꺼번에 남자 일곱 명을 처치하는 동안 다른 반란자들은 도망치는 사람들을 뒤쫓아가 난도질했다. 가족이 딸린 가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우선적으로 선택되었다. 운 좋게도 뗏목을 타고 다른 섬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구한 사람도 여덟 명이나 되었다.…… 

그 1차 공격으로 소년 여섯을 포함한 열 명을 죽였고, 부상을 입고 산호초에 널브러진 여섯 명도 얼마 안 가 모두 죽었다. 

2차 학살은 사흘 후인 7월 18일 실행되었다. 1차 공격 때 달아난 여자 네 명과 소년 15명이 그 표적이었다. 날이 무디다며 동료의 칼을 건네받은 안디리스는 만삭부녀에게 ‘미안하지만 죽어줘야겠어’라 말하고, 그녀를 쓰러뜨린 뒤 목을 땄다. 다른 여성 두 명도 함께 살해되었다. 

1629년 한여름, 한 척의 동양무역선이 좌초한 오스트레일리아 서부 해안에는 인가도 없었고, 따라서 접근하는 주민도 없었다. 바로 그곳 황량한 산호초에서 몇몇 잔인무도한 패거리에 의해 인간의 고귀한 존엄이 훼손되는 사악한 행위가 아무런 제지도 없이 자행되고 있었다. 

가장 사악하기로는 물범섬 학살극이 있은 직후의 ‘우는 아이’에 대한 독극물 투여일 것이다. 바타비아 호가 아직도 항해 중일 때, 부상인 코르넬리스는 어느 여자 승객의 갓난아기가 울어 보채는 통에 잠을 설친 적이 있었다. 그 아이는 분명 건강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약제사 출신 부상인은 아이를 돌보지 않았다. 배가 좌초한 다음 엄마는 자신은 갈증에 시달리면서도 마른 젖을 물렸을 만큼 뜨거운 모성애를 발휘하고 있었다. 부상인은 울며 보채는 그 아이를 죽이기로 마음먹고, 비밀리에 독약을 조제했다. 독약 주성분은 염화제1수은으로, 성인이라도 다량 복용하면 치사의 위험이 있다고 알려진 설사약이었다. 부상인은 부하를 시켜 아이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며 조제한 약을 투여토록 하고는 그 진행 상황을 지켜보았다. 약효가 있었던지 아이는 울음을 그쳤으나 혼수상태에 빠졌을 뿐 죽지는 않았다. 그걸 보고 부상인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 제기랄! 그 독약으로는 아이를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 했네. 

생존자 중 가족수가 가장 많기로는 바스티안스 목사였다. 그에게는 아내와 일곱 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 중 둘째 유딕 양은 21살로, 결혼 적령기였다. 그녀는 여섯 명을 살해한 견습사관 하이센의 구애를 받았다. 목사는 내키지 않았으나 설쳐대는 반란자 틈에서 어느 쪽이 괴롭힘을 덜 당할까를 저울질했다. 당시 네덜란드 풍습은 결혼하려면 반드시 신랑 측 부모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 절차를 밟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이센은 첫날밤을 함께 보내는 것만으로 약혼 절차를 치른 것으로 하자고 제의했다. 

이에 대한 목사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 살인자 위원(기록에 의함) 중 하나인 하이센이 딸에게 청혼을 해왔다. 내가 딸에게 말했다. 여러 사람에게 능욕을 당하기보다 한 남자에게 법적으로 매이는 게 낫지 않는가고. 그 날 밤, 살인자들이 몰려와 딸을 내놓으라고 소리치며, 거부하면 모두 죽이겠다고 했다.……나중 딸이 능욕은 당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처럼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여자승객들이 무사할 리 만무였다. 모두 22명 가운데 세 명의 미혼여성은 알게 모르게 반란자들의 먹이가 되었으니 말이었다. 

목사의 나머지 가족도 모두 반란자들의 손에 살해당했고, 살육 드라마는 이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 바타비아 호 선실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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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난파선의 생존자를 버려둔 채 구조선을 부른다며 자카르타로 향한 보트는 천신만고 끝에 7월 3일 자바의 남서 해안을 목격하였고, 그 나흘 후에는 자카르타 항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필수품도 거의 없이 최소한의 식수만 가진 보트가 장장 1,000마일의 항해를 감당한 예는 거의 없다고 원작자는 말하고 있다. 그곳에는 여러 척의 네덜란드 무역선이 정박하고 있었다. 

이제 아브롤요스라고 하는 죽음의 무덤에 잔존해 있을 생존자들을 구출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리하여 야콥스 선장은 빠진 채(선장 야콥스는 선원법 상 갖가지 혐의로 기소된 상태였다) 대상인 펠사아르트가 앞장을 선 구조선 사르담 호가 자카르타를 출항한 것은 산호초에서 처절한 살육 드라마가 자행되고 있던 7월 15일이었고, 두 달 후인 9월 17일 아침 드디어 ‘난파선의 잔해가 일렁거리는 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발견했다. 

현장에 도착하고도 사르담 호는 금방 구조 활동에 들어가지 못 했다. 부상인을 비롯한 반란자들이 이제는 방어군으로 편성된 생존자들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 상황에서 코르넬리스 등 반란군이 구조선을 탈취할 계획을 세우고 접근하였으나 무장을 해제를 당했고, 전원이 곧 체포되었다. 

당시 대상인이 주도적으로 신문하고 기록으로 남긴 보고서 내용은 이렇다. 

- …… 반란자들의 자백과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을 통해 그들은 120여 명(정확하게는 124명)을 익사시키거나 살해하였다. 살해에는 온갖 잔인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그들 중 1급 살인자들은 아직 살아 있었다. 최고 살인자는 병사였던 반 오스, 헨드릭스, 포수 얀센…… . 

- 재판 과정에서 코르넬리스는 줄곧 자신은 반란자들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동조하였으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거짓 진술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반란자들을 향해 그렇지 않느냐는 식으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려 했다.…… 

하지만 법은 엄격했다. 더욱 동양무역으로 국부(國富)를 증대시키는 게 최대 현안이던 네덜란드로서는 아브롤요스에서 자행된 일련의 살해 행위가 중죄인 선상반란(船上叛亂)보다 더 무겁다고 보고 그들에 대한 단죄를 통해 하나의 교훈을 남기고자 한 결과였다. 

반란자들에 대한 심판은 식민지인 자카르타에서 이루어졌다. 이듬해 1월 말, 자치령 총독에 의한 최종 판결이 나왔다. 적극적인 폭도는 20명이었으나 여섯 명은 도망을 쳤고, 나머지 14명이 처형되었는데 그 중 다섯 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비참한 최후를 맞맞은 사람은 당연히 주모자인 코르넬리스로, 그는 목에 올가미가 씌워지기 전에 오른쪽 손목을 절단 당하는 추가 형벌까지 받았다. 다른 세 명 범죄자들은 심하게 매질을 당한 다음 쇠사슬에 묶인 채 자카르타에서 추방되었고, 프레데릭 역시 무거운 형구(刑具)를 쓰는 벌을 받았다. 

가장 무거운 판결을 받은 자는 반란군 부사령관 피터스였는데, 그에게 내려진 형벌은 ‘스레바퀴 파열형’이었다.…… 

선장 야콥스에 대한 뒷이야기는 어디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원작자는 왜 중요한 이 언급을 빠트렸을까. 

사견(私見)이지만,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해난사고(살해극)로 기록된 바타비아 호 사건의 원천적 시발(始發)이 선장 야콥스에 의한 ‘잘못된 항로선정’임을 고려한다면, 그는 가장 무거운 판결을 받은 반란군 부사령관 피터스를 제치고 그 자리에 차지했어야 할 장본인이라는 일반론(一般論)에 필자도 동의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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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필자는 독자들에게 한 가지 아쉬움을 전한다. 이는 항행선의 운명은 전적으로 선장의 유무능(有無能)과 합리적 판단력으로 결정된다는 안전항해의 일반론에 근거해서다. 

그것은 ‘20년도 넘게 동인도를 항해한 유능한 선장’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야콥스가 바타비아 호를 일찍이 1세기 반 전(1947년) 포르투갈 항해가 바스코 다 가마가 개척한 최단거리인 인도항로(케이프타운에서 동북 방향의 침로)를 따라가는 올바른 선택을 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미지의 세계인 인도양 동부 해역(오스트레일리아 서부 해안)으로 바짝 붙어가는 우회적(迂回的)인 항로를 선택하였는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원문에 묘사되고 있는 당시의 항해 모습은 이렇게 되어 있다. 

- …… 희망봉을 돈 배는 강한 샛바람을 받아 격랑의 남위 40도선 상 불모지인 세인트 폴과 암스테르담 섬 사이를 통과하여 동양을 향해 정동(正東) 방향으로 항진하였다.…… 

따라서 야콥스가 지극히도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선택을 하였더라면 항해일수도 훨씬 단축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지의 세계에서 배를 좌초시키는 해난사고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120명이나 되는 무고한 인명의 살해도 막을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다음은 마지막으로 <한국 해양문학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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