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현의 양망일기 ㉑ 바다, 그리고 낭만에 대하여 2
하동현의 양망일기 ㉑ 바다, 그리고 낭만에 대하여 2
  • 하동현 작가
  • 승인 2019.11.08 08: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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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상심의 바다(Sea of heartbreak)’에서

삼십 오년 전 뉴질랜드 어장에서였다. 선단의 일등항해사들에게 회사여직원들로부터 단체로 편지와 선물꾸러미가 도착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무작위로 파트너를 지정하고, 미래의 선장인 젊은 항해사들을 격려하라는 회장님의 지시에 따른 깜짝이벤트였다. 내막도 모른 채 모두가 한껏 들떠서, 야간 당직 때 가상의 단체 미팅이라도 하듯 서로의 사연을 읽고 비교하는 재미가 컸다.

내 짝(?)은 C자 이니셜을 가진 서울 본사 아가씨였다. ‘건강하시라’라는, 너무도 간결해 억지로 보낸 티가 역력한 엽서 한 장에, 연예주간지 ‘선데이 서울’ 몇 권, 유행가요를 구운 카세트테이프가 한 묶음이었다. 그저 단발성 위문행사라 여길 수밖에 없었던 나와는 달리, 착각은 무한리필이라 제법 긴 내용의 편지를 받았던 몇은 자신을 향한 연정으로 오인해 잠들을 설쳐야했다.

도대체가 ‘살살’이란 말을 몰랐던 터프가이 촌놈 항해사가 있었다. 이 친구가 그저 일면식 정도에 지나지 않은 한국에서의 사무적인 만남과, 그 한 통의 위문편지를 부부라는 인연으로 승화시키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답장을 계속 보내주지 않으면 바다에 뛰어내리겠다는 협박성 서신을 줄기차게 보내고, 어기를 마치고 귀국해 본사에 드러눕다시피 온 천하에 사랑을 맹세한 결과였다.

지금에야 데이트 폭력이니 스토커니 바로 영창감이겠지만, 처녀 앞길 막아서서 사방 천지에 소문은 다 나버렸지, 울고불고 도망이라도 쳤다가는 지구 끝까지 따라 올 것이 불을 보듯 뻔하고, 뱃놈출신 임직원 선배들마저 결코 나쁜 선택이 아닐 거라며 우호적인 바람까지 넣었으리라. 하지만 이것저것 다 제쳐두고, 죽어도 너 아니면 안 되겠다는 화끈한 돌격대의 순정에 슬그머니 본인의 마음도 열리지 않았을까.

손 편지의 힘은 이토록 위대하며, 그런 시절도, 그런 사랑도 있었다. 회사방침에 따라 위문편지 한 통 보냈다가 외통수로 코가 꿰여, 결국 못 이기는 척(?) 평생 반려가 되어 준 그녀와,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 갈’ 그때 그 꽃다웠던 여직원 아가씨들, 이 세상 어디에 있건 모두가 행복하기를.

야간당직을 마치고 썰렁한 고독이 한 양동이 엎질러진 침실에 들어서면, 버릇처럼 주간지를 펼치고 구형 카세트플레이어를 눌렀다. 습기에 늘어진 테이프에 볼펜 두 자루를 꽂아 탄력이 팽팽해지게 감아가면서.

‘바람 바람 바람’의 김범룡은 이름이 희한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다. 이선희의 ‘아름다운 강산’을 들을 때면, 한 곡 씩 부를 때마다 몹시 허기가 질 것이며 혹시라도 까무러치지나 않을까 염려를 했다. 위스키 한잔을 털어 넣고 쪽잠을 청하며 듣던 ‘사랑의 미로’, ‘비 내리는 영동교’, 그리고 ‘창밖의 여자’와 ‘희나리’ 같은 노래들. 주간지를 펼치면 드라마 스틸사진이었던지 뽀글파마에 어깨 뽕이 들어간 양장차림의 투(Two) 미숙, 젊은 날의 김미숙과 이미숙이, 또 한 쪽에는 한복 차림의 황신혜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선녀 같은 자태로 웃고 있었다. 젊은 항해사의 허한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바다 위를 연처럼 떠다녔다.

입항해서 겨우 반나절 외출시간이 주어지면, 남 섬 크라이쳐치(Christchurch – 여행서에 죄다 ‘크라이스트쳐치’라 표기하지만 st는 묵음이다)의 대성당광장(Cathedral square)에 퍼져 앉아 기네스맥주 병나발을 불었다. 갈 곳도 반겨줄 사람도 없었다. 뛰거나 걸어 닿을 수 없을 만큼 고향 땅은 너무도 멀었고, 언제나 목적지가 바뀌었던 이방인의 어깨에 남반구의 햇살이 무심히 내려앉았다. 헤비급 복서를 연상시키는 원주민 마오리족 떠돌이 가수가 버스킹으로 ‘상심의 바다’를 불렀다.

The lights in the harbor 항구의 불빛은

Don’t shine for me 나를 위해 빛나는 게 아니네.

I’m like a lost ship 나는 바다에서 길을 잃고

Lost on the sea 표류하는 배와 같다네.

This sea of heartbreak 사랑을 잃은 외로움에

Lost love and loneliness 이 상심의 바다에서……

부두로 돌아갈 차비만 남겨두고 지폐와 동전을 탈탈 긁어 그의 키타케이스에 던졌다. 돌아갈 곳은 바다뿐이었으므로. 노래를 마치면 그가 내게 물으리라. 떠돌이 가수가 방랑자 뱃놈에게, ‘너는 어

 

디로부터 와서 이제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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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속에 담은 편지 - 장편수기 ‘마린보이의 꿈’에서 발췌, 재구성한 글이다.

현지 식품회사와 조인트벤처(합작투자) 형태로 입어했을 때다. 외국배들이 현지규정을 지키며 조업하는지를 감시하고, 생물학적 자료를 관찰하는 업무로 항차마다 번갈아 탔던 옵서버(observer)와의 기억이다.

앤드루(Andrew)라는 이름을 가진 순둥이 친구가 승선했다. 속눈썹이 긴 앳된 모습에, 바다를 소재로 글을 쓰고 싶어 이 직업을 선택했다는 몽상가 같았던 친구. 나는 그를 영국왕자와 이름이 같다고 그냥 프린스(prince)라 불렀다. ‘비주얼’상 내가 몇 살 더 많은 줄 알았다가, 장난처럼 동시에 펼치기로 한 내 선원수첩과 그의 주민증(ID card)에 박힌 출생년도가 같아 동갑내기 친구가 됐다.

“한국인들은 태어나면 바로 한 살 이라고? 매년 1월 1일에 또 한 살 씩 더 먹는다고? 그런 셈법이 어디 있나. 나보다 많다고 하고 싶어서 그랬지? 괜찮아. 거짓말 했다고 인정해.”

강력한 저기압이 바다를 들쑤셔 조업을 못하고 피항할 때는 그의 방에서 맥주를 마셨다.

“빈 맥주병 내가 가져도 되지? 그리고 선원들 마시고 난 빈병들도 모아주면 고맙겠어.”

의아해 하는 나에게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은 이야기를 눈망울을 초롱거리며 한 편의 시를 읊조리듯 들려준다.

영국에서인가 짝사랑에 빠진 한 청년이 사랑의 고백을 담은 편지를 빈 병에 넣고 바다와 만나는 강어귀에 띄웠단다. 수십 년 후, 그 여인의 딸인지 손녀인지가 한참 거리가 떨어 진 한적한 해변에서 파도에 떠밀려 올라 온 병을 발견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 찾아보니 그 남자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할머니가 된 상대 여인이 ‘바보, 그때 정식으로 고백하지 그랬어.’ 라며 아주 슬퍼했다는, 내용 자체보다 들려주는 그의 표정이 더 아련했던 이야기.

몰아치는 파도 속에서 청취하기에는 영 분위기가 살아나지 않는 애잔한 이야기였지만, 혼자 도취해서 왈칵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또 하나 고백을 덧붙였다. 가진 것과 외부요건을 따지는 것은 동서양이 마찬가지인지, 사랑하는 여자가 있지만 어떤 맺어질 수 없는 연유로 혼자 애달파하는, 제 딴에 가슴이 미어지는 러브스토리였다.

그래서 해와 달과 바다에 자신의 사랑을 서약하는 편지를 병에 넣고 밀봉해 끝도 없이 바다에 던지고, 이는 자신의 사랑이 변치 않기를 맹세하는 일종의 의식이라 말했다. 같이 맥주를 마시던 이등항해사가 웃을 수도 없고 딱히 격려할 말도 없는 어색한 분위기를 깼다.

“이 양반이 호강에 받혔네요. 해수비누로 바닷물에 머리 감고 이런 개고생 하는데 사랑이 무슨 밥 먹여 줍니까. 특례보충역이나 끝내고 집에 가 농사나 지었으면 좋겠네요. 참, 병을 바다에 집어던지는 건 이 나라 환경정책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요?”

싸롱(사관식당)에서 이 친구와 고전영화 ‘더스틴 호프먼’의 ‘졸업’을 감상했다. 여자 친구의 결혼식장에 난입해 신부를 끌고 십자가로 문을 봉쇄하며 도망치는 엔딩을 열 번도 넘게 돌려봤다. 사랑을 쟁취한 주인공들 보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울컥하는 이 친구 보다, 솔직히 나는 신부를 빼앗긴 신랑의 꼬락서니가 더 안쓰러웠고, 도망친 저 인간들은 이제 어쩔 건데 하는 한가한 걱정을 했다.

이 친구가 바둑을 ‘희고 검은 돌로 하는 어떤 게임’이라 표현하며 가르쳐 달라 졸랐다. 장기와 바둑은 애당초 무리였다. 장기는 체스와 비슷하다는 개념까지는 알아들었으나 휘갈겨 쓴 한자가 아예 해독 불능이었고, 땅따먹기 형태라는 설명에 바둑은 간단한 룰을 아는 정도에 그쳤다. 대신 오목은 줄기찬 연마로 제법 나와 겨룰 수 있을 경지까지 올랐다. 엄지나 검지를 사용한 튕겨내기 게임인 ‘알까기’를 할 때면 승패를 떠나 어린 소년처럼 파안대소하며 즐거워했다.

반면 자신의 임무에는 철저했다. 말도 안 통하는 하급선원들과도 눈인사를 나누며 자신의 조사업무에 관한 협조를 요청했고, 갑판장과 마주치면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동양식 인사를 했다. 영감은 아주 흡족해 했다.

“젊은 양놈이 싹수가 된 놈이네. 뭐 불편한 것 있으면 말해봐라. 내가 애들 시켜 애로사항 처리해주께. 허허.”

회식 때는 소주에 취해 선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어울렸다, 사진기로 촬영을 하며 나중에 꼭 우리와 함께 한 경험을 글로 써보겠다는 약속을 했다. 개인주의에다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서구식 사고에 자란 친구였겠지만, 네 것 내 것 구분도 없이 한 덩어리로 뭉치는 우리 생활방식에 은근히 매력을 느낀 것 같았다.

이 친구가 항차를 마치고 하선할 때, 솜씨 좋은 한 선원이 팔뚝만한 나무를 깎아 사포로 문지르고 성냥과 천을 접착제로 붙여 만든 작은 모형 범선을 선물했다.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며 자신은 마땅히 줄 선물이 없음을 미안해했다.

나는 그를 포옹하며 용기백배해서 그 애절한 사랑을 쟁취하기 바란다는 인사를 했던 것 같다. 이별이 못내 아쉬워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그는 우리 배를 떠났다.

고운 정만 들었던 그가 남긴 흔적은 내 부탁으로 백지에 또박또박 정성들여 써준, 뉴질랜드의 아리랑이라 할 수 있는 노랫말 한 장이었다. 한국 전쟁에 참전한 5,000여 명 뉴질랜드 군인들의 향수를 달래주던, 원주민 마오리족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의 전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으로 시작되는, 한국에서 ‘연가(戀歌)’로 번안되었던 바로 그 노랫말.

 

포 카레카레 아나 Pokarekare ana

나 와이 오 와이아푸 Nga wai o waiapu,

휘티 아투 코에 에 히네 Whiti atu koe E hine

마리노 아나 에…… marino ana e……

(북풍 몰아치는 와이아푸의 바다는, 그대가 건넌다면 잠잠해지리라…….)

이십 년이 지난 후, 해기사 면허 갱신 교육장에서 당시 이등항해사였던 친구와 마주쳤다. 노예계약이란 표현을 썼던, 승선예비역 기간만 끝나면 미련 없이 바다를 떠날 것이라 호언장담 했었지만, 결국 바다를 버리지 못하고 출신학교인 고향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의 베테랑 선장이 되어 있었다.

그날 자갈치 선술집에서 소주잔을 마주하고, 우리는 그때 그 순진했던 옵서버 친구를 떠올렸다. 그가 가슴 아픈 사랑을 성취했는지, 성품 그대로 여자의 언저리만 맴돌며 가슴만 앓다가 우리처럼 나이 들어 버렸을지 궁금해 하며 마주보고 웃었다. 그리고는 ‘포 카레카레 아나’를 흥얼거렸다.

이런 말들이 있다. ‘지나간 모든 것들은 추억이 된다.’ 라거나 ‘모두가 추억을 먹고 산다.’ 같은 말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추억하고 싶은 것만이 추억이 되고, 고통의 기억은 평생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 때 그 젊은 날의 바다에서 ‘낭만’은 사치였던가. ‘고통스럽고도 황홀하던’ 바다에서의 젊은 날, 그 비린내 나고 지질했던 낭만들은 달콤했던가.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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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동 총각 2019-11-14 11:21:18
멋진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생을 관조하는 작가의 시선에 낭만과 정이 뚝뚝 묻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