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현의 양망일기 ⑳ 바다, 그리고 낭만에 대하여
하동현의 양망일기 ⑳ 바다, 그리고 낭만에 대하여
  • 하동현 소설가
  • 승인 2019.10.08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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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은 흔들리며 중심(中心)잡고, 늘 출렁이며 수평(水平) 맞추는 일…….’

친구가 시집을 한 권 묶어냈다. 서명과 함께 일필휘지로 갈겨 써준 자신의 시구절 한 줄이다. 이성배 시인, 시집제목은 ‘이어도 주막’. 60편 죄다 바다와 해양을 관조한 시들이다.

10년 전에 이미 해양문학상을 수상했으니 글판에서는 한참 선배다. 육군 장교출신인 그와 선박특례로 군 면제인 나, 무슨 이유에선지 술을 멀리하는 친구와 주정뱅이인 나 사이에 어울릴 건덕지라고는 탈탈 털어봐도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늑대는 개를 쉬 알아보는 법이었으니, 첫 만남에서 이미 나는 그의 몸에 각인된 역마살을 읽었고, 바다와 사랑에 빠진 중늙은이의 눈빛을 낚아챘다.

친구와 나 사이에 바다가 있었다는 말이다. 터프와 무식(?)의 양대 산맥인 군 출신과 뱃놈출신이 바다라는 공통분모로 만났으니 똥창이 맞을 수밖에.

애초부터 뱃놈인 나야 몸으로 때우며 바다를 지켰다지만, 그는 바다를 품기 위해 ‘셀프’로 치열한 현장을 함께하며 숫돌에 칼을 벼리듯 촉수를 단련해왔다. 그의 시들은 절절히 바다와 함께하는 생의 이면들을 그려낸다.

친구는 바다를 경전(經典)으로 읽어냈다. 바다는 거대한 깨우침의 공간이자, 우리가 결국 다시 돌아가야 할 시원(始元)의 장소임을 말하고 있다. 비틀거리며 살아 온 우리 인생, 땀, 눈물, 소금, 흔적 같이 닳아빠진(?) 어휘들이 출항, 파도, 항해, 조업과 만나 그의 시에서는 경전으로까지 승화되어 버렸다.

표제작인 ‘이어도 주막’은 통일을 염원하며 쓴 시다.

이어도에 주막 하나 지어야겠다.

천지天地에서 헤어진 압록강과 두만강

다시 만나는 청정바다에

초가지붕 올리고 봉놋방 뜨끈뜨끈 데워 놓고

개다리소반에는 미역국과 파래무침

참가재미 한 마리 구워야겠다

동해와 서해로 흐른

구애하는 귀신고래 황홀한 노래

밤새워 청해 들어야겠다

손바닥에 박힌 소금알 혀로 핥으며

파도에 갈라진 발바닥 서로 주무르며

파도소리로 하나 되는 첫날밤을

창호지 구멍으로 훔쳐보아야겠다.

날이 새면 또 다시 흘러갈 난바다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만남을 위해 다시

그 봉놋방 장작불 지펴야겠다

-이어도 주막, 전문

 

‘바다로 돌아가다’에서 “나의 항해는/ 바다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다”라 말하며, ‘태풍경보’에서는 “세상은 늘 태풍 속에 있고/ 사는 것이 바로서기라면/ 난파할 수는 있어도 침몰은 없다”라 일갈한다. 바다가 바로 인생이라는 등식을 정립하여, 삽질에 잽 같은 공허한 서술이 아니라 묵직한 강펀치에 돌직구 수사다.

자신은 치열한 삶의 현장인 바다에 대해 어설픈 낭만을 경계했다지만, 아픈 사랑도 사랑이듯 내 눈에는 죄다 그가 바다를 사랑하면서 획득한 ‘아픈 낭만’으로 읽힌다. 편편이 절창이다. 하나 더 인용하자.

녹슨 갑판아래 죽음을 밟고 살아도

파도에 유서를 쓰지 마라

출렁거리는 문장

해독할 수 없다

바다는 하늘에 닿아있고

바닷길 따라 하늘로 돌아간다

부풀어 오른 수평선에 뱃머리 마디마디

피멍울 맺혀도

그리운 이름 부르지 마라

소리조차 침몰하고 사랑마저 삼켜버리는

바다는 대답이 없다

-바다에는 메아리가 없다, 부분인용

 

출간기념회에서 열권을 주문하며 생색내려다 퇴짜를 맞았다.

“주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바다를 이해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라면 맘대로 가져 가. 정 보태주고 싶으면 인터넷 주문으로 돈 내고 사든지.”

그에게는 물비린내와 흙냄새가 섞여 있다. 밤을 밝히는 바다낚시와 풍찬노숙의 백두대간 국토순례, 낭만파 에너자이저, 뱃속에서부터 탯줄을 통해 듣고 습득하는 토박이말을 칭하는 ‘탯말’ 연구와 보급에도 일가를 이룬다. 그의 시집 머리말은 자신의 시 ‘하선’에서 뽑아낸 몇 줄이다.

한 세상이 배 위인기라

사는 기 파도 우에 미끄럼인기라

내는 고기를 쫓고 또 태풍은 내를 쪼차오고

죽을 똥 살 똥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니

벌써 여기 아이가

참말로 잠깐이제 잠깐인기라

이제 고마 내도 세상에서 내릴 때가 된기제

항구가 바로 코 앞이제

 

이 친구 근무지는 여수다. 여수(麗水), 뷰티풀 씨? 뷰티풀 와터? 그 항구도시의 지명마저 낭만이 묻어나는, 나그네의 노스탤지어 여수(旅愁)와 동음이의어가 아닌가. 사방천지 ‘아픈 낭만’에 둘러싸인 친구여, 둘 다 잔정이라고는 없이 툭툭 끊어지는 대화로 방금 통화를 마쳤지만, 트레이드마크인 카우보이모자에 담배를 꼬나문 모습이 다시 보고 싶네.

우리 도반인 선장 한 분이 먼바다에서 귀국하면 같이 여수로 달려갈 거네. 갓김치에 싱싱한 횟감이나 조금 준비해두게. 여수밤바다를 앞에 하고 합해서 2백 살에 육박하는 셋이 마주 보고 앉으면, 내 자네 시 한 편 낭송할 테니 우리 늙은 뱃놈들에게 술 한 잔씩 쳐주시게.

 

2 시인친구에 낭만에다 술까지 언급한 김에, 술좌석에서 써먹던 건배사들을 추려본다. 나름 고심해서 건져낸 것들이다.

먼저 ‘묶여있는 배는 안전하지만, 배는 안전을 위해 건조된 것은 아니다. 떠나자, 저 먼바다로’가 있다. 호흡이 좀 길지만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예 없이 뱃놈들끼리만 모였을 때 읊조리는 건배사다. 현역이건 바다를 떠났건 이 문장을 외칠 때는 잠시 숙연해지기도 한다.

철강왕 카네기의 어록을 빌려 쓴 건 이렇다. ‘반드시 밀물은 오리라, 그날 나는 바다로 나아가리라’, 젊은 후배들이나 사업에 부침을 겪는 사람들이 섞였을 때 같이 기분을 업그레이드시킬 ‘맞춤형’이라 어디서건 써먹기에 그럭저럭 괜찮다.

좀 불경스러운 게 하나 있었다. 구국의 일념으로 이순신 장군께서 올린 상소에서 따온 것. ‘신에게는 아직 싸울 수 있는 배가 열두 척이 남아있사옵니다’ 라는 비장한 출사표를 응용한 것이다.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를 ‘금신전선 상유십이잔’으로, 아직 마셔야 할 술이 열두 잔이 더 남았다고 비튼 말인데, 장군께 왠지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어 슬그머니 목록에서 빠져버렸다.

내 딴에 혼자 ‘모비딕’의 저자 ‘허먼 멜빌’이 남긴 말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

‘나는 금지된 바다를 항해해서, 야만(野蠻)의 해안에 상륙하고 싶다. - I love to sail forbidden seas, and land on barbarous coasts’

한참 젊었던 초임선장 시절, 출항제에서 음복 한잔에 이 문구를 중얼거리는 나를 보고 영어를 이해하지 못했던 선원들이 어리둥절해하던 기억이 난다. 소설 한 편 앞머리에 내 걸고 싶은데 부족한 재주라 아직 썩고(?)있는 중이다.

3 우리말은 찬란하고 오묘하다. 바다는 ‘바라보다’의 줄임말이며, 바다라는 단어에서 자음을 떼어내면 ‘아아’라는 감탄사가 된다는 문학적 표현이 있다.

해납백천(海納百川), 백 갈래의 강과 하천을 수용하는 것이 바다다. ‘낮은 곳에 임하여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다’에서 ‘받아’가 ‘바다’로 굳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성철스님께서는 ‘낮은 곳이 바다가 된다’라는 말씀으로 겸손과 포용을 일깨워 주는 예로도 사용하셨다.

바다는 우리의 생활터전이며 과학적이고,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공간이다. 마지막 남은 자원 개발의 보고(寶庫)이자, 감상과 동경의 대상으로 각박한 세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기도 하다.

늦은 나이에 ‘해양문학’에 입문하며 여러 스승들을 만났다. 황을문 전 해양대 교수께서 바다친화 접근방식을 이렇게 강의하셨다.

먼저 바다를 애정을 가지고 관조(觀照)하라는 견(見), 역사, 생태, 정보, 해양상식들을 학습하며 바다를 알아나가라는 지(知),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직접 바다를 체험하라는 행(行), 친밀감을 가지고 마음을 심으라는 정(情), 바다를 통해 인생을 깨우치라는 각(覺)의 단계로 설명하셨다. 바다를 즐기고 누리기에 앞서 사랑으로 다가서는 건전한 ‘자세’부터 갖추라는 의미가 기저에 깔려있다.

바다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담고 있다. 광활 무비의 공간에 다양한 색조와 역동적인 몸부림, 주변 조형물과 해양생물들과의 조화로 바다의 움직임은 언제나 변화무쌍이다. 종교와 신화, 구원과 주술에 삶의 기원과 치열한 생의 현장, 모험과 의지의 실현, 동경과 낭만까지.

생과 멸, 긍정과 부정의 뚜렷한 양면성을 지닌 바다다. 파멸까지 야기할 수 있는 노한 바다는 극한상황을 극복하려는 불굴의 의지로 삶에 더욱 애착을 가지게도 하고, 모성(母性)으로 인간의 정서를 순화시키며 낭만을 선사하기도 한다. ‘모험의 바다’와 ‘동경과 낭만의 바다’라는 두 얼굴을 가진다.

그는 ‘바다를 늘 마음에 두고 그리워하는 태도’를 동경으로 보고, ‘이상적인 바다를 정서적으로 즐기는 태도’를 낭만으로 분류하셨다.

‘배에서 살게 되면 바다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 설혹 바다를 본다고 하더라도 배의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비행사였던 생떽쥐베리가 ‘성채(城砦)’에서 창공에서 내려다 본 바다와 배를 이렇게 표현했다. 뱃놈출신인 나도 뭔가 알쏭달쏭이었는데 스승의 해석이 뒤따른다.

‘양초의 본질이 밀랍이 아니라 그 불빛에 있음’을 지적했다는데, 별나라에서 불러온 ‘어린 왕자’를 다시 별나라로 돌려보낼 만큼 신(神)적 영감을 가졌던 양반답게, 바다를 운송수단같이 이용적인 측면으로만 보는 편협한 시각을 힐책하고, ‘동경과 낭만’으로, 모성의 광활함이 닿는 더 큰 본질에 접근하라는 암시가 담긴 의미일 거라는 말씀.

 

4 고백하거니와 현역 때 오히려 제대로 바다를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가까이 늘 함께했었는데도. 나이가 들고 인생을 조금이나마 알고 나서야 어렴풋이 그 본질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뭉뚱그려보면 내게는 사랑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유홍준 선생의 말씀이다.

사족 한마디.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태풍 ‘링링’으로 서해도서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땀 흘려 복구 지원 중이라는 해병대 제대말년 작은 아들의 연락이 있고, 미국연안에서 자동차운반선 ‘골든레이’호의 전도사고와 다행히 한국선원 4명이 마지막으로 구조되었다는 뉴스가 나온다.

이런 마당에 한가하게 낭만 운운하고 있음이 면구스러워,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노총각 선장과 아내와의 그 어색하고 민망했던 첫 선 자리를 끄적거리다 죄다 지워버리고, 스승의 바다친화 방식을 요약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안전한 복구와 무사구조를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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