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漁村情談 ⑳ 가을 전어에 감사하고, 꽃게에 눈물이 난다
김준의 漁村情談 ⑳ 가을 전어에 감사하고, 꽃게에 눈물이 난다
  • 김준 박사
  • 승인 2019.10.08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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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현대해양] 위도 파장금으로 가는 배는 격포에서 출발한다. 채석강으로 더 알려진 곳이다. 학창시절 변산해수욕장과 함께 채석강은 낭만여행의 대명사였다. 아련한 기억과 반대로 핵폐기장을 둘러싼 갈등이라는 아픈 기억도 있다. 기억의 극단을 뒤로 하고 위도로 출발했다.

바다에서 본 채석강과 수성당이 또렷하다. 바닷가에 퇴적층이 수만 권 책을 쌓아 놓은 모습이 중국 채석강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노닐다 바다에 떠 있는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곳이다. 그 옆에 칠산바다의 풍어와 뱃사람의 안녕을 관장하는 개양할미를 모신 ‘수성당’이 있다. 격포항이 부안의 중심항이 되기 전에는 곰소항을 그 전에는 줄포항을 이용했다. 항에 흙과 모래가 퇴적되면서 중심포구가 줄포에서 모항으로 그리고 격포로 옮겨졌다.

위도 파장금에서 격포로 향하는 여객선
위도 파장금에서 격포로 향하는 여객선

 

전어가 가고 꽃게가 온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찬바람이 일자 부안은 꽃게와 전어로 들썩이다. 꽃게보다 먼저 존재감은 드러내는 것은 전어다. 전어는 남해와 서해 바다에서 잡힌다. 가을만 아니라 여름, 심지어 봄에도 곧잘 시장에 나오기도 한다. 특히 사천과 남해에서는 여름철이 전어가 더 맛이 좋다는 말도 있다.

격포항 여객선터미널 옆 포구에 작은 배들이 빼곡하다. 막 잡아온 전어가 어창에 넘실넘실 파닥파닥 난장판이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대형 수족관을 설치한 트럭으로 옮겨진다. 반시간 만에 10여 척의 전어는 트럭에 실려 포구를 빠져나갔다.

격포어시장 앞 포기에는 대형 크레인이 꽃게를 가득 담은 상자 수십 개가 한꺼번에 들어올린다. 전어에 이어 꽃게 철이 시작된 것이다. 꽃게는 자망을 이용해서 잡지만 전어는 살아 있는 상태로 잡기 위해서는 선망을 주로 이용한다.

꽃게잡이를 좀 더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위도로 향했다. 위도는 격포항에서 40여분 거리에 있는 부안군에서 가장 큰 섬이며 고군산군도의 많은 섬이 연륙·연도되면서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섬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기어장으로 유명한 칠산어장의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당시 치도리에는 파시가 형성되어 팔도에서 고기잡이 배들이 들어와 지역별로 마을을 이루며 머물렀던 곳이다. 이후 동력선이 등장하면서 치도리의 영화는 파장금으로 옮겨졌다. 격포항에서 출발한 배는 심청 인당수 이야기가 전하는 임수도를 지나 파장금에 도착했다.

파장금항에 삼치잡이 홀치기 낚시를 준비하는 장대들이 몇 척의 배에 꽂힌 걸 보니 시간은 분명 가을로 달려가는 것 같다. 이즈음에 위도이 고기잡이 배들은 대부분 꽃게잡이에 전력한다. 파장금, 정금, 식도 등 고깃배들이 새벽이면 왕등도 인근으로 꽃게그물을 털로 나간다.

꽃게를 따는 위도주민들, 뒤로 보이는 섬이 위도에 딸린 식도
꽃게를 따는 위도주민들, 뒤로 보이는 섬이 위도에 딸린 식도

새벽 물을 보는 어민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다. 정금도와 망월봉의 그림자가 붉게 물들기 시작한 벌금포구에 드리워져 있다. 곧 동이 틀 것 같다. 벌금포구는 조차가 심해 이른 새벽에 꽃게그물을 보러 나가려면 배를 용머리 근처에 정박을 시켜야 한다.

여객선이 닿는 파장금을 비롯해 정금, 벌금, 깊은금, 미영금, 논금 등 지명 끝에 ‘금’이 붙은 지명이 많다. 이 금은 ‘구미’로 ‘곶’과 달리 섬이나 뭍으로 들어온 굽은 해안을 말한다. 포구로 활용하기 좋고 바지락이나 김 양식 등 양식기술이 발달하기 전에 마을어장으로 훌륭한 곳이다. 그 배후로 어촌마을이 만들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용머리는 벌금어부들의 어장배들이 들고 나는 길목이다. 바다로 향하는 어부의 심성처럼 왕등도로 향한 곶이 용머리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금도와 식도가 파도와 바람을 막아주니 안쪽으로 벌금과 수군진이 있었던 진리가 아늑하다. 너머에 여객선이 오갈 수 있는 수심이 확보된 파장금이 있다. 조선시대 수군진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도, 파시촌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도 식도나 정금도가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어부들은 왕등도 부근에서 꽃게그물을 건져와 따기 시작했다. 용머리 맞은편에 위치한 식도에서도 그물을 배들이 오간다.

가을 꽃게는 수게가 좋다. 간혹 암게가 있기는 하지만 그물에 걸린 게들도 대부분 수게다. 산란을 해야 하는 암게보다 살이 꽉 찬 수게가 왕성한 활동을 하다 그물에 걸린 것일까. 자망그물에는 꽃게가 가득하다. 아직 이르다는 어부의 말에 흥이 실려 있다. 오늘 건져 올린 그물이 묵직한 탓이다.

격포항과 달리 이곳에서 꽃게를 따는 사람들은 부부이거나 가족이다. 새벽에 가서 그물을 보고 올 수 있는 거리에서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조업을 하는 탓이다. 큰 배를 가지고 먼 바다로 나가서 그물을 놓는 배들이 아니다. 위도에 사는 혜택이라 해야 할까.

막 잡아온 전어를 위판하는 모습
막 잡아온 전어를 위판하는 모습

 

위도, 제주도와 바꾸지 않는다

위도를 두고 작은 해금강이라 하는 이도 있다. 부안의 명물 투어버스 주인공 백기사는 ‘제주도와 위도를 바꿀 이유가 없다’고 한술 더 얹는다. 위도는 어장만 좋은 것이 아니라 경치 좋고 인심도 좋단다. 그래서 아픔도 많았다. 세월호보다 앞서 위도 페리 침몰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를 반면교사 삼지 않았던 해운정책의 적폐가 세월호라는 더 큰 사고로 이어졌다고 입을 모은다.

인심 좋고 평화롭던 위도에 광풍이 몰아친 것은 핵폐기장 설치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망금봉에서 치도리로 내려오는 기슭에 핵폐기장을 설치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부안군의 결정과 정부의 의지에 부안군은 물론 섬에서, 마을에서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이웃은 물론 친척과 가족 사이에 갈등이 생겨났다.

핵폐기장 설치는 백지화 되었지만 섬사람들 마음에 큰 상처를 안겼다. 그 이면에는 새만금사업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차피 새만금으로 어장도 무너져 고기잡이도 옛날 같지 않을 텐데, 더 늙기 전에 목돈으로 보상이라도 받자는 심산도 숨어 있었다. 또 이를 부추기는 개발론자들의 감언이설도 있었다. 정부는 슬며시 숟가락을 얹고 지역에서 합의하면 큰 사업을 주겠다는 소문을 흘렸다. 꽃게잡고 소라잡고 전어를 잡는 주민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용머리에서 꽃게를 따는 어부들을 만날 수 있을까. 격포항에서 펄떡펄떡 뛰는 전어가 유통될 수 있을까. 최근 위도에는 해안을 따라 펜션과 카페들이 생겨나고 있다. 찾는 여행객도 늘었다.

 

위도에 가면

위도에 가면 절집 내원사와 진리 관아건물 그리고 대리의 띠배놀이 전수관을 들러야 한다. 내원사는 여름철 벼가 익어갈 무렵 피기 시작해 수확할 때까지 무려 100일 동안 피고 지는 배롱나무가 더 알려져 있다. 300년의 나이답게 중후한 수형을 갖추고 대웅전 앞 좌장을 하고 바다를 향하고 있다. 배롱나무 붉은 꽃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왕등도와 십이동파도 주변에 꽃게 잡히고, 위도 주변에서 전어고 그물에 걸리기 시작한다.

내원사
내원사

깊은금에서 치도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좁은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나지막한 요사체와 대웅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웅전 옆에 300여년이 되었다는 백일홍은 절정을 지났지만 그 자태가 한창때 못지않다. 해안도로를 따라 미영금과 논금을 지나 거륜도를 앞에 두고 펼쳐진 해안을 보면 작은 해금강이라 했던 이유를 알듯하다.

위도는 격포 채석강, 솔섬 그리고 고창 고인돌과 선운산 등과 함께 국가지질공원이다. 한 집만 사람이 산다는 거륜도를 뒤로하고 고개를 넘으면 닿는 곳이 대리마을이다. 이름만큼이나 큰 마을이다. 무엇보다 정월초에 원당제와 띠배놀이로 전국에 알려진 섬마을이다. 정월 초 마을 뒤 칠산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진행되는 원당제는 우리나라 마을제의 중에서도 으뜸이다. 과거 칠산바다의 조기어장과 조기잡이 파시의 영화를 가늠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당제를 지내고 내려와 바닷가에서 행하는 띠배놀이는 원당제의 절정이다. 모든 액운을 보내고 풍어를 기원하는 의례이다. 대리만 아니라 진리, 치도리, 벌금 등 위도의 섬마을은 모두 정월초에 당제를 지내고 있다.

치도리를 지나 진리에 이르면 옛 수군진으로 명량해전을 마치고 충무공이 잠시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관아의 동헌을 돌아보자. 1970년대 초반까지 면사무소로 사용되었다. 위도는 전라우수영에 속하며 충청수영과 경계에 있다.

새만금 이후 물길이 막히면서 위도 주변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아직도 뚜렷한 활용방안을 내놓지 못하는 새만금이 사정을 보면서 자연이 주는 선물에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의 오만함을 읽을 수 있다. 최근에는 태양광을 설치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방조제 내부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방조제 외부의 바다와 섬이다. 양식어장을 잃고 한시적으로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한 해 한 해 양식을 해야 하는 어민들이다. 새만금 외부의 어부들은 좋은 어장을 잃었다. 철철이 꽃게가 오고 전어가 찾아주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위도를 찾은 섬답사전문카페  ‘섬으로’ 회원들
위도를 찾은 섬답사전문카페 ‘섬으로’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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