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현의 양망일기 ⑲ 한일관계, 장보고를 떠올린다
하동현의 양망일기 ⑲ 한일관계, 장보고를 떠올린다
  • 하동현 소설가
  • 승인 2019.09.06 01: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과의 통상마찰이 무더위에 지친 국민들을 열 받게 한다. ‘한일어업협정’ 같은, 전공과 관계있는 분야에도 슬그머니 걱정이 앞선다. 그야말로 가깝고도 먼 나라다.

기질과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간극이 아닐까 싶다. 일본 도덕의 근간은 충(忠)이고, 사무라이로 대변되는 ‘칼’의 정서다. 우리는 효(孝)가 최고의 도덕이며 선비정신을 추구한다. 한일청구권협상, 위안부문제, 충돌하는 사안마다 저들은 흘러간 과거는 묻어버리자는 전제하에 지나간 합의에 대한 신뢰를 주창하지만, 이쪽은 세상이 변했더라도 ‘바로잡기’를 원하며 ‘이치’와 ‘도리’를 내세운다. 무(武)와 문(文), 이에 따른 ‘괴리’로 보인다는 말이다.

여러 신문의 사설에서 20년 전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의회에서 했던 연설을 언급했다. 정치성향의 호불호는 제쳐두고, 일본을 들어다 놓았다, 쥐었다 폈다 했던 노련한 레토릭과 실리주의의 기술적인(?) 부분만은 눈여겨 볼만하다.

먼저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을 일본정부와 언론, 국민들이 힘을 실어 줘 살아남아 여기까지 왔다며 ‘은혜’ 같은 감상적인 어휘로 치하한다. 전후(戰後)에 피와 땀으로 경제와 민주주의를 성장시킨 배울 점이 많은 나라라 한껏 치켜세운다.

하지만 제국주의 전쟁으로 한국에 고통을 준 사실을 당당하게 언급하면서, 불행했던 과거는 임진왜란과 식민지배를 합친 40여 년으로, 2,000년을 흘러온 교류와 협력의 역사를 외면해서는 안 되며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말자는 점을 강조한다. 핵심 문구는 이렇다.

‘일본은 과거를 직시하고 역사를 두렵게 여기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고, 한국은 일본의 변화된 모습을 올바르게 평가하면서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는 외환위기 때 힘을 보태준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며 정점을 찍었다.

‘진정한 반성과 사과’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정치와 외교의 무기는 사실상 말(言) 밖에 없다. 실례되는 표현이지만 ‘어르고 달래고 꼬시기’로 보인다. 정상회담 후 당시 오부치 총리와의 공동선언에 처음으로 ‘사죄’라는 대목이 포함되고, 실질적으로도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와 ‘어업협정’의 예처럼 양국의 관계와 협력이 현저히 개선되었다.

처칠이 말했다. 과거와 현재가 싸운다면 미래가 망가진다고. 이참에 우리경제의 체질을 바꾸고 국민들을 결속하는 기회로 삼자는 지식인들의 말에 공감한다. 더불어 ‘품격과 수준을 갖춘 응전’이 필요할 것이다. 골목대장의 견제의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유치한 ‘곤조’와 ‘겐세이’에 ‘몽니’나 ‘어깃장’으로만 대항할 수도 없지 않은가. 현역 때 바다에서 일본 배들을 많이 만났다.

어선에서는 일본 운반선을 만나 어획물을 넘겼고, 반대로 운반선을 탈 때는 일본 어선들의 짐을 넘겨받았다. 김치깡통과 조용필의 노래가 담긴 테잎을 선물로 건네면 단무지절임과 냉동 찹쌀떡이 답례로 넘어왔다. 이국 항구의 주점에서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술을 마셨다. 현지 건달들과 다툼이라도 일어났을 때는 혈맹으로(?) 뭉쳐서 대항을 했다. 동질성(同質性). 서로를 뼛속까지 이해할 수 있는, 같은 직업을 가진 뱃놈들이었으므로. 영어 한마디 못했던 하급선원들도 콩글리쉬로 주물러댄 이 말만은 할 줄 알았다.

“아임 씨 맨(I’m sea man), 유 아 씨 맨, 위 아 씨 맨. 올 투게더.”

현지인들은 우리를 잘 구별하지 못했다. 한국과 일본이 같은 나라인 줄 아는 무식한(?) 인간들도 부지기수였다. 남미 항구에서 만났던 한국계 필리핀 혼혈 기관장이 한국, 일본, 중국인을 구별하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들려줬다.

“걸음이 빠르면 일본, 중간이 한국, 느리면 중국. 또 옷 색깔 밝은 순서대로 일본, 한국, 중국. 눈꼬리가 올라가면 일본, 중간 일자형은 한국, 약간 처지면 중국…….”

젊고 무모했던 초임선장 때는 일본 대형어선 선장들로부터 귀중한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그들에게서 중고선박을 인수해 조업하던 때라 선박운용에 관한 조언도 많이 받았고, 어업기술 면에서도 배운 게 적지 않았다.

남자세계에서는 제일 먼저 나이와 그 분야에서의 소위 ‘짬밥’을 따지는 게 일반적인 통과의례다. 제법 친해져 허물이 없어질 때쯤 되면, 그들은 한국 선장들이 너무 젊다 못해 아예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들 같다는 농담을 했다.

결과만을 따지고 본다면 어획은 한국 배들이 압도적인 우위였다. 바다에서 그들의 조선술은 의외로 조심스러웠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어떤 연구나 실험을 진행하는 듯 경건한(?) 조업방식이었다. 우리는 달랐다. 겁 대가리를 상실한 듯 공격적이었다. 폭풍우로 바다가 뒤집어질 때, 피항을 하는 그들 면전에서 보란 듯이 그물을 던졌다. 걱정과 비아냥의 중간쯤 되는 어투로 그들이 묻고는 했다. 코리안, 그대들의 목숨은 도대체 몇 개나 되나?

포클랜드어장에서였다. 엄청난 풍어로 어가가 폭락했던 ‘오징어파동’ 몇 년 전에 일본 배들은 철수했다. 반입량이 수요를 초과할 것이라는 철저한 예상과 분석에 따른 결과였다. 늦은 밤 교신을 신청하면 아버지뻘 되는 늙은 어로장이 이것저것 차분하게 설명을 해줬다.

-이 정도로 오징어 뱅크(Bank, 군집의 의미)가 뭉치면 상어 아니라 고래가 와도 못 깨뜨려. 빙산의 출몰이나 강력한 태풍으로 수온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이 호황은 계속될 거야. 한국 배들은 지금 너무 많이 잡고 있는 거야.

잡담을 나눌 때는 정치와 종교, 아픈 역사는 건드리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다. 화제라야 기껏 내가 가보지 않은 나라와 항구의 술집에 대한 정보 정도가 대부분이었지만, 조선술, 항해술로 대화가 이어지다가 그의 입에서 우리 불세출의 해상영웅 장보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바다에서 40년을 보낸 영감어로장이 장보고의 조선, 항해술의 탁월함에 더해, 자신이 공부했다는 ‘글로벌 마인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교과서나 드라마로 다소 과장된 무용담에만 익숙해있던 나 자신이 언뜻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아마 그 어로장은 이제 고인이 되지 않았을까. 그는 천방지축 젊은 한국선장을 같은 길을 가는 동료로 대접했다. 자신이 나보다 먼저 습득한 노하우와 경험을 아낌없이 들려줬던 그에게, 몇 발짝 앞선 선진 국가가 후발 경쟁 국가를 대하는 태도도 그래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겹쳐보며 삼가 예를 갖춘다.

장보고(張保皐), 활을 잘 쏘아 궁복(弓福)이란 이름에 성씨도 없던 평민신분의 신라인. 당나라로 건너가 활 궁(弓) 자를 부수로 장씨 성을 취했고, 유사한 중국발음으로 이름을 ‘보고’로 지었으며, 무장(武將)이었기에 지킬 보(保) 자를 썼을 것이라 추정한다.

장보고
장보고

당시 위세를 떨치던 당나라에 대한 조공무역으로 한, 중, 일이 긴밀하게 엮여있던 시대였다. 오로지 실력만으로 승승장구해 해적소탕과 해상무역으로 명성을 떨치면서, 단순 조공과 수송의 편협한 틀을 깨고 민간자본에 의한 자유무역을 확장시켰다. 신분의 제약으로 비록 남의 나라에서 인정받고 성장했지만 조국을 걱정하고 잊지 않았다. 타국에서의 영화를 뒤로하고 귀국해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한다. 동포들을 약탈하고 노략질을 일삼던 해적들을 쓸어버려 깨끗한 바닷길을 만든다는 의미가 담긴 명칭이다.

당에 유학했던 일본 승려 ‘엔닌(圓仁, 또는 円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장보고 함대를 묘사한 여러 대목이 나온다. ‘신라선원들이 없다면 배를 운항하지 못 한다’는 서술로 당시 신라 선단의 탁월했던 항해술을 표현하고 있다.

강과 연안에서의 교역과 해전에서는 해저지형을 감안해 물품과 병력, 무기를 많이 실을 수 있는 평저선(平底船)을 선호했겠지만, 대양항해 때는 첨저선(尖底船) 형태의 배를 개량한 ‘신라선’을 운항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V자 형 선저로 흘수가 깊어 풍랑을 견디고 속도를 내기에 유리한 선체다. 승선인원 150명 정도에 무역물품들까지 싣는다면 만재톤수를 300톤 급 정도로 추정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초 대형선들이었다.

역풍항해, 현대의 요트처럼 돛을 비틀어 바람을 품고 좌우로 선체를 흔들며 파도를 올라타는 항법까지 구사했다한다. 선체 내부를 칸막이형태로 나누어 하중을 분산시키고, 선저가 일부 파손되어도 견딜 수 있는 수밀격벽구조라 일본에서도 이를 모방한 배들을 건조하려 했다고 기술한다.

특기할 사항을 하나 더 보태보자.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이전에 당나라 승려가 신라에서 자석을 입수해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개량과 변형이 있었겠지만, 나침반의 원래 이름이 신라침반(新羅針盤)인데 ‘신’자를 제거하고 중국이 ‘나침반’이라 칭했다는 설도 있다. 종이와 화약을 포함한 3대 발명품으로 중국이 자랑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형식의 나침반을 11세기 이후 송나라가 발명했다는 기록에 근거하면 신라가 훨씬 앞섰다는 주장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만큼 항해술이 발달해 있었다는 방증이다.

엔닌은 당에서 10년 수행하는 동안 장보고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체류, 인물의 소개, 통역, 경호, 안내, 이동 배편까지, 동포들의 신앙과 단합을 위해 그가 산동성 석도에 창건했던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서 신라인들 신세를 톡톡히 졌다는 말이다. ‘은혜’, ‘우러러보는 마음’ 같은 문장으로 그에게 감사 서신까지 전했다.

일본으로 귀국한 그는 임종 전 신라명신을 모실 절을 건립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적산대명신(赤山大明神)’, 즉 신라명신은 바로 장보고를 지칭한다. 제자들이 20여 년에 걸쳐 쿄토에 적산법화원의 명칭을 연계해 적산선원(赤山禪院)이라는 절을 세웠다.

일본에서는 그의 이름을 보배, 보물을 의미하는 보(寶)로 표기했다.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었고, 해군제독에 더해 ‘해상무역과 장사의 신’에 비견되는 거상으로 인식했다는 의미다. 거기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업에 운수대통을 기원하는 발걸음들이 줄을 있는다한다. ‘신용과 의리’로 무려 1,200년 전에 그는 이미 한중일 3국의 무역질서를 확립했다. 통상강국의 면모를 다졌으며 도전정신과 시대를 앞선 안목으로 해신(海神)으로 추앙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를 내다보고, 상황에 따라 우군이었다가 적으로도 변신을 밥 먹듯이 했던 중국과 일본까지 함께 품은 ‘글로벌 리더’였다. 자신을 키워준 나라일지라도 위법과 대의에 어긋나는 관행에는 강경하게 대항했지만 정당한 해상무역은 권장하고 보호했다. 비록 적국이라도 미래의 친구들을 따뜻하게 감쌌다. 편견을 버린 대담한 포용력이었다.

기껏 일본 배들과의 조업경험이 고작인 퇴역 뱃놈 주제에, ‘대의와 정의’를 바탕에 깔고 정치와 외교를 구사한 장보고의 예를 끌어 들어봤다.

작금의 문제는 언젠가는 물러날 특정 정치인과 인기에 편승한 곁다리들의 망집에서 비롯된 결정일 뿐이다. ‘NO JAPAN’이 아니라 ‘NO 그 인간’이라는 말도 벌써 나오지 않았나.

막장과 해피엔딩은 한 끗 차이다. 함부로 칼을 빼든 얼치기 무사도 적당한 체면과 명분에 퇴로만 열어주면 슬그머니 주저앉기도 한다. 억지 주장은 국제사회에 우리의 떳떳함을 입증하면 될 일이다.

진흙탕 싸움은 민간의 영역이다. 국민들이 알아서 한다. 한다면 하는 국민들이다. 정치권 내부의 자중지란을 없애고, 강온양면 작전으로 정정당당하게 나가자는 것 외에 더 이상은 할 말 없다. 어차피 나머지는 정치와 외교의 몫이다.

광복절 경축사에 대통령은 김기림의 시 ‘새나라송(頌)’을 빌어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나라’를 천명했다. 바로 그날 태풍 하나가 일본을 두들겼다. 광복절 특사라는 기발한 농담에 또 한 번 크게 웃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