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14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14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 남송우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승인 2019.08.07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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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서의 문학이 지향하는 바

[현대해양] 향파 선생은 여러 칼럼을 통해 문학이란 것이 인간에게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자주 했다. 이런 질문에 답하는 글 중의 하나가 <내일에의 동경 - 어째서 문학은 인생의 창일 수 있는가>이다. 그는 우선 인간을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찾고 창조하는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본질의 하나로 생각과 창조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문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자 했던 향파에게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람은 태고로부터 늘 뭔가를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사람은 그 생각한 바에 따라서 늘 뭔가를 만들어 보거나 또 그 만들어진 것으로써 늘 뭔가를 시험해 왔다. 결국 인간의 역사는 사유와 행동의 연속인 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뭔가를 부단히 찾고 있다는 사실의 반영이었다.

그러면 인간이 이러한 탐구를 지속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보다 나은 인간다운 삶을 구가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보다 나은 인간다운 삶을 구가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인간의 본질적인 삶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지만, 부조리한 현실은 인간의 삶을 늘 비본질적인 상태로 나아가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삶이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사이를 오가며 인간다운 삶을 탐색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인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다. 이런 근원적 질문에 대해 문학은 생생한 인간 삶의 속살을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지향해야 할 본질적인 삶의 방향을 성찰하게 한다. 이러한 성찰과 탐색은 문학만의 역할은 아니다. 그래서 향파 선생은 인간이 추구하는 학문이며, 기술이며, 종교며, 예술 등 모든 영역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보다 인간적인 생활’을 실현하는 것이란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인간이 그처럼 끝날 줄을 모르도록 찾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기로 인간은 이렇도록 소란스레 학문이며, 기술이며, 종교며, 예술이며로 목숨을 내걸듯 해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여기에 대한 대답은 아주 짧은 한마디 말로써 충분하다. 그것은 보다 인간적인 생활의 만족에 대한 동경, 그것이다. 더 좀 구체적인 설명을 가하란다면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최선의 최미(最美)의 생활을 실천하겠다는 꿈인 것 뿐이다. 우리의 사회가 복잡하고 아무리 다양하다 하더라도 모든 문화의 선봉은 한결같이 ‘보다 인간적인 생활’이란 이 하나의 지표를 향해서만 겨누어지고 있음에 불과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겠다는 자각에서가 아니라면 어떤 역사학도 어떤 사회학도 어떤 심리학도 어떤 철학도 이 세상에는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인간이 현실 속에서 추구하는 삶의 궁극적인 지점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일임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모든 영역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이 하나에로 모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향파 선생은 특별하게 문학이 그 어느 부문보다도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구현하는 일에 대해 더 많은 요구를 받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 이유는 문학이 지향하는 바가 우선은 고차적인 인간생활에의 동경을 그리고 있고, 그 문학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최고로 완전한 세계에 접할 수 있기 때문으로 본다.

오늘날 문학이 어느 부문의 요구보다도 더 많은 일반의 주문을 받고 있는 듯한 사실도 필경엔 이보다 고차적인 인간생활에의 동경에다 그 기인을 두고 있다. 문학에 대한 진정한 이해야말로 읽는 사람을 한걸음 앞당겨서 인간이 그리고 있는 최고로 완전한 세계에 접근시켜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향파 선생의 지적처럼 오랜 생명을 지닌 명작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삶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 명작을 제대로만 읽고 이해한다면, 인간 이 구현할 수 있는 최고의 삶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다. 문제는 우선 그러한 수준의 작품을 작가가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고, 그 다음은 독자가 작품이 제시하고 있는 그러한 삶의 가치에 공감하고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문학을 통한 인문학적 가치의 생성이 가능하게 된다. 문학 현상은 작품의 생산자인 작가만이 존재한다고 해서 가능하지 않다. 작가를 통해 형상화되는 작품이 존재해야 하고, 그 작품을 읽어줄 수용자인 독자가 현실적으로 나타나야 완성된다. 어쩌면 독자와 만나지 못한 작품은 작품으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가 없다. 독자와의 만남을 통해 작품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양한 편차를 지닌 독자들이 동일한 한 작품을 통해 이해하고 읽어내는 수준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다름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선이해의 차이가 빚는 차이일 뿐이다. 독서 현상에서 나타나는 이 차이를 메우는 방법으로 우리는 전통적으로 독서토론이란 메뉴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독서토론은 개인적 편차를 보완할 수 있는 길임과 동시에 스스로 실천력을 내장할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토론은 요즘 유행하고 있는 강의 위주의 인문학을 실천적 인문학으로 전환시켜나가는 매개로 활용할 수 있다. 인문학의 궁극적 목적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삶을 지향함이다. 이를 위해서는 깨닫는 차원의 인문학 공부만으로는 부족하다. 깨달은 바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담보되지 않는 인문학은 화려한 지식의 향연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의 삶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내지는 못한다. 몇 십년 전의 향파 선생의 문학을 통한 인문학의 필요성을 엿듣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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